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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이냐 사이다냐…더 독해진 순옥드 '7인의 탈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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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9호 19면

폭주하는 ‘7인의 탈출’

김순옥 신작 ‘7인의 탈출’은 역대급 자극적 전개로 막장드라마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사진 SBS]

김순옥 신작 ‘7인의 탈출’은 역대급 자극적 전개로 막장드라마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사진 SBS]

미혼모가 딸을 길바닥에 버리고 연예계에 투신한다. 십여년 후 양부모가 잘 키워놓은 고등학생 딸을 사업자금 확보를 위해 데려온다. 그런데 딸이 교내출산 가짜뉴스에 휘말려 문제가 되자 공갈범에게 딸을 죽이라고 사주한다. 한발의 총성과 함께 딸은 사라지고, 딸을 모함한 아이돌 지망생과 손잡고 미혼모는 승승장구한다.

장안에 화제인 SBS 드라마 ‘7인의 탈출(이하 7탈)’ 여주인공 금라희(황정음)의 피도 눈물도 없는 서사다. 시청률 30%를 기록하며 미니시리즈계에 막장드라마의 새장을 열었던 ‘펜트하우스(이하 펜하)’ 김순옥 작가와 주동민 PD 콤비가 새로운 차원의 ‘피카레스크 복수극’을 천명한 신작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거짓말과 욕망이 뒤엉킨 한 소녀의 실종에 연루된 악인들의 생존 투쟁과 그들을 향한 피의 응징을 그린다’는 게 기획 의도다.

내년 3월에 시즌2 방영 확정

‘7탈’은 ‘펜하’보다 막장 수위가 훌쩍 높아졌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등 비현실적이고 개연성 없는 전개를 기본 전제로 깔고 봐야 한다는 ‘순옥적 허용’이란 말이 원래 있지만, ‘순옥드(김순옥 드라마)’는 이제 막장을 넘어 잔혹의 반열에 올랐다 할 만하다. 원조교제·교내출산·청부살인 등 온갖 자극적인 사건이 폭주하듯 휘몰아치며 단 2회 만에 TV드라마 화제성 1위에 올랐고, 최고 시청률 7.8% (닐슨코리아)로 전 채널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사수하고 있다. 초반 인기로 이미 내년 3월 시즌2 방영이 확정됐지만, 방심위에 다수의 민원이 접수됐고 SNS에서도 ‘임계점을 넘었다’ ‘내가 환각을 보는 듯하다’ ‘영혼이 피폐해진다’는 반응이 대세다.

순옥드는 폭주를 해도 여전히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로서 입지가 굳건한 셈이다. 최고 시청률 37.5%를 찍은 일일드라마 ‘아내의 유혹’(2008)으로 이름을 알린 김순옥 작가는 ‘인어아가씨’ ‘오로라공주’의 임성한 작가와 함께 막장계 투톱으로 꼽힌다. 임성한의 최근작 ‘아씨 두리안’이 웹소설 마스터플롯을 차용한 ‘회빙환(회귀·빙의·환생)’ 코드에 고부간 동성애 코드라는 설정을 더한 로맨스 판타지로 타깃층을 갈짓자로 헤매며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면, 김순옥의 행보는 다르다. ‘아내의 유혹’부터 일관되게 ‘복수’에 천착한 순옥드는 그 자체로 장르가 됐다. 탐욕으로 점철된 인간 군상의 암투와 롤러코스터 급 쾌속 전개, 상상을 초월하는 반전을 촘촘히 버무린 ‘순옥드’라는 세계관이 탄탄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런 자극은 없었다. ‘7탈’은 19금을 내건 5화 이전에도 OTT 콘텐트가 울고 갈 만큼 강렬한 사건과 충격적 반전의 연속이다. 낯선 용어인 ‘피카레스크 복수극’을 내세워서일까. ‘피카레스크’는 사전적 의미와 별개로 요즘엔 주로 웹소설에서 악인이 주인공이거나 모든 인물이 악인의 성향을 띄는 형식을 가리키는데, 그 악행의 파노라마가 점입가경이다.

김순옥 신작 ‘7인의 탈출’은 역대급 자극적 전개로 막장드라마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사진 SBS]

김순옥 신작 ‘7인의 탈출’은 역대급 자극적 전개로 막장드라마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사진 SBS]

최근 ‘빈센조’(2021)를 시작으로 ‘모범택시’ ‘악마판사’ ‘더 글로리’까지, 사적 복수를 하는 다크 히어로물이 많았지만, 대체로 다크 히어로들은 흑화될 수밖에 없는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7탈’에서 악의 단죄자로 등장한 매튜 리(엄기준)도 방다미(정라엘)를 추락시킨 가짜뉴스의 또 다른 희생자 이휘소(민영기)가 흑화한 다크 히어로다. 그런데 다크 히어로 위에 최종 빌런이 있다는 게 다르다. 복수극 플롯에 ‘오징어게임(이하 오겜)’류의 데스게임 컨셉트까지 얹어 이해관계가 난수표처럼 얽힌 등장인물들이 난투극을 벌인다.

점점 막장이 고도화되는 김순옥 유니버스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과연 이대로 폭주해도 괜찮은 걸까. 강도 높은 막장이 마냥 해롭지만은 않다는 시각도 있다. 심리학자인 조지선 연세대 객원교수는 “최근 학계에서 스트레스 호르몬이 나오는 콘텐트의 시청자들이 실제 팬데믹 같은 위기 상황에서 심리적 탄력성이 높더라는 흥미로운 연구가 있었다”면서 “폭력·위선·차별·인간성 파괴 같은 삶의 어둡고 무서운 면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콘텐트로 간접 경험한 사람이 실제 위기가 닥쳤을 때 멘탈을 빨리 회복하는 효과가 있다는 뜻”이라고 소개했다.

눈에서 레이저 광선을 쏘는 임성한식 막장에 비해 리얼리즘에 기반한 순옥드에는 사이다 효과가 없지 않다.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들을 대놓고 까발리는 데서 오는 쾌감이다. ‘펜하’가 상류사회의 부동산 전쟁과 입시비리 등 한국사회의 고전적 병폐를 까발렸다면, 최신 버전인 ‘7탈’이 까발리는 건 바로 지금 욕망의 용광로가 된 엔터테인먼트 업계와 그 욕망의 찌꺼기와 같은 SNS 가짜뉴스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게 된 현실이다.

가짜뉴스 공화국 안에서도 ‘과거가 아니라 전생까지 파헤쳐지는’ 엔터 업계 정상에 오른 금라희와 한모네(이유비)는 더 큰 탐욕을 불태우는 중이고, 그 탐욕을 미끼 삼은 데스게임의 설계자는 엔터 업계를 쥐락펴락하는 굴지의 모바일 플랫폼 총수다. 눈을 가린 수많은 사람들이 작은 단말기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가짜뉴스를 확산하는 것을 표현한 오프닝 영상은 데스게임에 영문도 모른 채 참여하고 있는 평범한 우리 모습이다.

비난 일색인 댓글에서도 나름의 순기능을 발견할 수 있다. ‘다같이’ 욕하면서 보는 쾌감이다. 조지선 교수는 “그런 댓글이 반증하는 게 우리가 집단적으로 어떤 게 선인지 알고 있다는 것”이라면서 “드라마가 던진 이야깃거리에 대해 같이 욕하고 할 말이 많다면 우리의 흥미를 자극했다는 것이고, 다들 나처럼 화가 나 있음에 동질감을 느끼고 공유하는 데서 쾌감을 즐기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비난이 대세인 이유가 있다. ‘임계점을 넘었다’는 자극적 표현의 수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허구 속에서도 진리를 드러내는 핍진성으로 시청자를 설득하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는 “자극적인 표현이 그 자체로 목표인가, 자극으로 끌어들여 의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게 목표인가가 문제”라면서 “‘오겜’처럼 엄청나게 자극적이라도 그것 없이는 도달하지 못하는 성찰과 각성이 있다면 아무도 ‘막장드라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자극적인 표현 없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자극이 가장 주도적인 동력이 되다 보면 갈수록 시청자의 반응이 무뎌지니 더욱 더 강도를 높여갈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해외서도 폭력 난무 막장 인기

‘7탈’은 아직 시청자를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강한 자극만큼 이야기의 밀도가 치밀하지 않고, 최종 빌런의 정체도 오락가락 한다. ‘오겜’에서 게임 속에 들어와 있던 최종 설계자 오일남 노인을 패러디한 듯 여러 장면에서 복선으로 등장한 ‘K’(김도훈)가 재벌로 암시되며 모든 이들을 장기 말처럼 움직이는데, 그 이유를 상식적으로 짐작할 수 없다. 거듭되는 반전 속에서 K로 인해 추락한 인물이 K의 흑막으로 암시되는 또 다른 음모를 돕고 있으니, 작가의 빅픽처가 과연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맹목적으로 보이는 순옥드의 폭주는 그만큼 암울한 현실을 방증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영미 평론가는 “2008년 쇠고기 파동 때 ‘아내의 유혹’이 등장한 것처럼 정치나 사회에서 희망과 비전이 안 보일 때 막장드라마가 득세한다”면서 “지금은 경제와 기후 위기까지 더해져 곧 인류가 멸망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 재난물이나 오컬트처럼 공포 속에서 성찰을 주는 진지한 작품도 나오지만, 마약주사처럼 자극만 밀어 넣어서 현실의 불안과 공포를 잊게 하는 막장도 판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막 중반에 진입한 만큼, 얽히고설킨 관계망이 정리되고 휴머니티가 힘을 얻는다면 시청자를 설득시킬 지도 모른다. 조지선 교수는 “모든 드라마가 인간적인 요소를 담지 않는다면 성공할 수 없다. 악이 판치는 독한 드라마를 끝까지 견디며 보는 이유는 결국 소수라도 정의와 선이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라면서 “김순옥이 대중이 뭘 원하는지 아는 작가라면, 악인들이 승승장구하는 데서 오는 인지부조화의 불편함이 해결되도록 이야기를 전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해외에서도 아마존 프라임의 최고 히트작 ‘더 보이즈’ 처럼 섹스와 폭력, 차별 등의 이슈에 대한 극단적으로 끔찍한 묘사가 난무하며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이 치솟는 드라마가 전례없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 현상을 분석한 소논문의 저자 린 쥬버니스 박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무서울 정도로 현실에 가까운 어둠과 공포의 묘사를 통과하는 허구의 놀이기구에 시청자들을 태워놓고, 그 안에서 꿋꿋이 인간적인 모습을 유지하는 사실적인 캐릭터들을 보여주는 것. 그 조합이 바로 대중이 지금 당장 필요로 하는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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