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에디터 프리즘] 21세기에 사는 20세기 복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59호 30면

황정일 경제산업에디터

황정일 경제산업에디터

최근 미국에서는 느닷없이 복권 열풍이 불었다. 미국의 로또인 파워볼과 메가 밀리언스 당첨자가 세 달간 나오지 않아 당첨금이 계속 쌓인 결과다. 쌓인 당첨금은 1조5000억~2조원에 달한다.

사회주의 중국에서도 요즘 복권 열풍이 불고 있다. 중국 재정부에 따르면 올 1~8월 복권 판매액은 3757억 위안(약 70조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1.6% 급증했다. 그런데 미국과는 결이 좀 다르다. 중국에서는 “경제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오는데,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청년들이 복권 구매로 벼락부자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로또 등 복권 구입 현금만 가능
온라인 복권도 계좌이체 해야

실제 웨이보(중국판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복권 구매 인증샷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중국의 청년 실업률은 공식 통계로도 이미 20%를 넘겼다. 어느 나라나 경제가 어려워지면 복권 같은 사행성 산업의 인기가 높아지기 마련이다. 갑자기 눈에 들어온 미국과 중국의 복권 열풍 뉴스에 계시인가 싶어 인생 역전을 꿈꾸며 복권 판매소로 향했다. 하지만 인생 역전 희망은 수초 만에 물거품이 됐다.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만 달랑 들고 간 때문이다. 전국 어디서나 초고속 인터넷이 가능한 21세기 한국에서 복권은 스마트폰 페이(신용·체크카드)로는 살 수가 없었다.

복권은 관련법상 현금으로밖에는 살 수가 없다. 법에서 ‘신용카드 결제방식’은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일반 신용카드는 물론 체크카드도 포함된다. 온라인 복권도 마찬가지다. 복권 판매소가 신용·체크카드를 받았다가 적발되면 최대 500만원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법에서 신용카드 결제를 규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행성 조장 우려 때문이다.

신용카드는 일정기간 사용한 금액을 결제일에 정산하는 식으로, 카드 대금을 납부하기 전까지는 엄연한 빚이다. 빚을 내면서까지 인생 역전을 꿈꾸는 행위를 막고 있는 것이다. 언뜻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신용카드를 무분별하게 쓰던 시대도 아니고, 더욱이 길거리에서 미성년자에게까지 신용카드를 발급하던 시절도 아니다. 더구나 1인당 복권 구매 한도가 법으로 정해져 있는데 계속해서 신용카드 결제방식을 막는 건 편의성을 떨어트릴 뿐이다.

관계 당국도 이를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 같다. 기획재정부는 2016년 온라인에 한해 로또를 신용카드로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복권 및 복권기금법 시행령 개정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당시 기재부는 “복권 구매의 편의성 확보 차원”이라며 구매 한도가 있어 부작용은 크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온라인 복권 역시 여전히 신용카드로는 결제할 수가 없다. 인터넷전문은행 계좌를 만들어 복권 구매액을 미리 넣어 두거나, 계좌이체만 가능하다.

한가하게 웬 로또 타령이냐고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복권 판매량이 적지 않다. 미국이나 중국처럼 열풍까지는 아니지만 우리 역시 코로나19, 고금리 등 경기 침체 속에 복권 판매량이 꾸준히 증가세다. 지난해에는 복권 판매액이 처음으로 6조원을 돌파, 6조4293억원에 달했다. 정부는 올해 6조7000억원어치의 복권을 발행할 예정이고, 내년 복권 판매액을 지난해보다 1조원가량 늘어난 7조3000억원으로 예상하고 있다.

누가 사냐고? 19세 이상 성인 절반 정도가 최근 1년 사이 복권 구매 경험이 있다. 올해 초 기재부가 공개한 복권 인식도 조사 결과다. 복권 구매 경험자 중 24.4%는 매주 복권을 구매한다. 특히 응답자의 74%가 ‘여러 측면을 고려했을 때 복권이 있어서 좋다’고 답했다. 복권을 인생 역전의 요행으로 치부하던 시절도 이젠 아니라는 얘기다. 복권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고 현금 없는 사회가 된 지 이미 오래인 만큼 여전히 20세기에 머물고 있는 복권 구매 방식은 고민해 볼 만한 문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