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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상징 국수, 노인 앞에서 가위로 자르면 경을 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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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9호 24면

[왕사부의 중식만담] 식사 예절

서울 강남에서 VIP를 모실 일이 있었다. 약속 시각이 오후 6시였다. 먼저 도착하는 게 예의인지라 강북에서 2시간 전에 출발했다. 그 정도면 넉넉하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한강을 건너니 도로가 온통 주차장이었다. 결국 손님을 40분이나 기다리게 했다. 고맙게도 양해를 해줬지만 부끄럽고 식은땀 나는 일이었다. 그 뒤로 중요한 약속이 있으면 무조건 1시간 전에 도착한다. 길이 막히지 않으면 2시간 전에 가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날은 만나기로 한 분들과 근처 커피숍에서 부딪쳤다. 들어보니 다들 결례를 범하지 않으려 그런다고 했다.

# 식탁에 앉기 전에

약속 장소에는 10분 정도 일찍 입장하는 게 좋다. 주빈이 도착해 상석에 앉을 때까지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서서 기다린다. 안내를 받지 않고 눈치 없이 자리를 차지하면 식사 분위기가 썰렁해질 수 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중국은 회전 원판이 올려진 원탁을 많이 쓴다. 원은 화목과 단합을 상징한다. 가정이든 식당이든 상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식당에서 하는 단체 회식이라면 상사가, 가정이라면 초대받은 손님이 벽을 등지고 안쪽에 앉는다.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다. 자리 배치는 참석자에 따라 달라진다. 접대자는 입구 쪽에 앉아 오가는 음식을 관리한다.

서로 비슷한 체급이라면 상대에게 상석을 양보한다. 그렇다고 얼른 가서 앉으면 하수다. 태도를 떠보려 그러는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말처럼 양보와 겸손은 스스로 위신을 높이는 일이다. 진하게 먹고 마시는 자리는 상대 됨됨이와 진심을 살피는 기회이기도 하다.

# 식탁에 앉고 나면

청작대하( 炸大蝦). 제철 새우는 양념 없이 튀겨도 풍미가 뛰어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청작대하( 炸大蝦). 제철 새우는 양념 없이 튀겨도 풍미가 뛰어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장쑤(江蘇)성 쑤첸(宿遷)에 갔을 때 일이다. 초대받은 만찬이라 예상은 했지만 요리가 끊임없이 나왔다. 이제 그만 싶었지만 웬걸, 초청한 분이 그건 아니지 하며 거창한 요리 4개를 또 내놨다. 결국 그 맛난 음식은 손도 대지 못했다. 한국과 달리 중국은 손님이 접시를 깨끗이 비우면 대접이 시원찮았다고 생각한다. 체면과 염치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음식을 충분히 남겨도 실례가 아니다.

사회주의 혁명 초기 생존이 제일 과제였던 마오쩌둥 시절에는 없던 일이다. 개혁개방으로 경제가 팽창하던 덩샤오핑 집권기에 옛 풍습이 살아났다. 아니다 싶었던지 2012년 시진핑이 집권하며 칼을 빼 들었다. 호랑이와 파리(부패한 고위관리와 하급관리)를 함께 잡겠다며 지금까지 400여만 명 이상의 공직자를 처벌했다. ‘결혼식에는 샥스핀’이라는 말처럼 호화예식이 판치자 식장에서 샥스핀을 금지했다. 송로버섯·제비집 같은 고가 재료를 넣어 만든 월병 생산도 막았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 방중 때 샥스핀 대신 흰목이버섯탕이 나온 배경이다. 민간에서도 접시를 깨끗이 비워 낭비를 막자는 광판운동(光盤行動)이 벌어지고 있지만 일부의 과소비는 여전하다.

요리를 즐기며 모두가 유쾌하려면 요령이 필요하다. 냉채(冷菜)와 열채(熱菜)를 조리법과 재료가 겹치지 않게 골고루 시킨다. 과시하고 싶어서 진귀한 요리를 주문하기도 하는데 글쎄다. 샥스핀이나 제비집처럼 값비싼 요리를 꼭 대접하고 싶다면 믿을만한 요리사에게 부탁하는 편이 실속 있다.

식사는 상대방과 보조를 맞춘다. 원판 위 요리는 손님 쪽으로 돌려 먼저 맛보도록 한다. 내 순서가 되면 덜어내고 바로 옆자리로 보낸다. 한 가지를 집중공략 하거나 멀리 있는 요리를 일어서서 가져다 먹으면 체신머리없어 보인다.

상대의 취향을 파악해 이야깃거리를 준비해가면 좋다. 화제가 되는 뉴스나 그림·영화·음악 같은 예술 이야기도 좋다. 정치 얘기를 꺼냈다가는 자칫 분위기 썰렁해지니 피한다. 음식 얘기에는 누구나 귀 기울인다. 맛있다고 칭찬해주고 도우미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해준다.

회전판이나 요리 위에 있는 숟가락은 공용으로만 쓴다. 내 옆에 젓가락 두 벌이 놓여있는 경우, 안쪽 하얀 것은 개인용이고 바깥쪽 검은 것은 요리를 덜어오거나 상대에게 덜어줄 때 쓴다. 새우나 꽃게요리에 따라 나오는 물그릇은 음용이 아니라 비린내 묻은 손을 씻으라는 용도다. 상대방이 모르고 마셨을 때는 눈감아주는 게 센스다. 술이나 찻주전자 주둥이가 손님을 향하는 것도 실례이니 신경 쓸 일이다.

# 술 마실 때는

손님이 먼저 술잔을 들면 실례다. 주인이 잔을 들어 덕담을 건네며 건배를 제의한다. 몇 순배 돌고 난 뒤에는 자유롭게 마신다. 간빼이(乾杯)는 잔을 깨끗이 비운다는 의미다. 호기롭게 간빼이를 외치고 꺾어 마시면 속으로 저 사람 뭐야 한다. 잔이 비지 않아도 술을 채워주는 게 예의다. 술을 권하는데 못 마시겠으면 음료수 잔을 들어도 된다.

멀리 있는 상대가 술잔을 원탁으로 내게 보내거나 식탁에 있는 잔에 첨잔을 하면 검지와 중지로 식탁을 세 번 훑으며 절하는 모양새를 갖춘다. 청나라 때 황제들이 궁궐 밖으로 민심 탐방을 나갔다가 저잣거리에서 식사할 때, 수행원들이 은밀하게 표하던 예에서 비롯했단다.

# 생선요리를 먹을 때는

시대가 바뀌면 생각이 변하고 금기도 희미해진다. 사회주의 중국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지만 대만에는 옛 관습이 여전히 남아있다. 생활에 스민 관습은 대개 음식 이름이나 모양을 길흉화복과 연결 짓는다.

생선 꼬리가 상석을 향하면 안 된다. 머리를 상석 쪽으로 두면 당신이 우두머리라는 뜻이고, 등을 상석 쪽으로 놓으면 나라의 기둥이라는 의미다. 물고기 요리는 먹다가 뒤집지 않는다. 배반, 인생 급변, 배의 전복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요리는 대개 짝수로 주문한다.

새해에는 식탁에 교자와 물고기 요리를 올린다. 교자는 옛 중국 화폐인 원보(元寶)를 닮아 돈을 상징한다. 물고기, 특히 잉어를 먹을 때는 연년유여(年年有餘)를 외친다. 생선(魚)은 풍요를 뜻하는 여(餘), 잉어(鯉魚)는 이익(利益)과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국수는 장수를 뜻하니 절대로 가위로 잘라먹지 않는다. 노인 앞에서 그랬다가는 경을 친다.

중국은 넓고 넓어 지역마다 식탁 예절이 조금씩 다르다. 그래도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은 어디나 같다.

※정리: 안충기 기자

왕육성 중식당 ‘진진’셰프. 화교 2세로 50년 업력을 가진 중식 백전노장. 인생 1막을 마치고 소일 삼아 낸 서울 서교동의 작은 중식당 ‘진진’이 2016년 미쉐린 가이드 별을 받으며 인생 2막이 다시 바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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