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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 男 전문의 전국 7명 뿐…분만실 없는 50곳 '원정 출산' 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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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에 친인척 스무명 정도가 모였는데 가장 어린 사람이 서른 살이었어요. 명절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은 지 꽤 됐죠.”

지난 연휴 전남 무안에 있는 할머니 댁에 다녀왔다는 직장인 최모(32)씨는 아이들이 북적이는 시끌벅적한 풍경은 옛일이 됐다고 했다. 최씨는 “8명의 사촌형제가 있지만 유일하게 결혼을 한 사촌누나도 당분간 아이 낳을 생각이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합계출산율 0.78명. 가임기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자녀 수가 1명도 채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출생아 수가 연일 최저치를 경신하면서 달라진 명절 풍경처럼 아이 울음소리가 잦아들며 경고등이 켜진 곳이 또 있다. 산모와 아이로 북적여야 할 산부인과다.

저출산이 심화하며 지방 곳곳에는 문을 닫는 대형 산부인과가 늘고 있다. 광주 지역에서 25년간 분만을 책임져왔던 문화여성병원은 지난달 30일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았다. 산부인과 전문의 5명을 포함해 8명의 전문의가 있던 지역 대표 산부인과 병원이었지만 줄어드는 출생아 수에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했다.

같은 달 1일에는 울산 남구에 위치한 산부인과 프라우메디병원이 무기 휴원에 들어갔다. 지난해 울산에서 태어난 전체 신생아의 약 37%가 이 병원에서 태어날 만큼 규모가 있는 병원이었지만 의료인력 수급의 어려움이 컸다고 한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통계청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분만이 가능한 의료기관 수는 2020년 517곳에서 2022년 470곳으로 약 9% 감소했다. 10년 전인 2012년(739곳)과 비교하면 36.4%(269곳) 줄었다. 산부인과가 있지만, 분만실이 없는 시ㆍ군ㆍ구는 지난해 12월 기준 50곳이다. 이 지역에 사는 임산부는 출산을 위해 다른 지역까지 ‘원정’을 가야 한다. 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1년부터 분만취약지를 대상으로 산부인과 개소 시 10억원의 시설ㆍ장비비와 추가 운영비를 지원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분만 전문를 의사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다. 연도별 신규 산부인과 전문의 배출 현황을 보면 2020년 134명에서 2021년 124명, 2022년 102명으로 감소하고 있다. 이마저도 분만을 하는 산과보다는 암이나 내분비질환 등 부인과를 선택하는 이가 많다.

男 산부인과 의사, 15년새 91명→7명 급감 

의료계에선 의료인력이 산과를 기피하는 주요 원인으로 심각한 워라밸(일과 삶은 균형) 붕괴를 가장 먼저 꼽았다. 분만의 특성상 아이가 언제 나올지 몰라 응급 상황이 빈번한데다 최근엔 의료 인력 감소로 1인당 당직 횟수가 더 잦아지고 있어서다. 이런 상황에서 산모들이 여성 전문의의 진료를 선호하면서 신규 남자 전문의 수가 2007년 91명에서 2023년 7명으로 90% 이상 급감한 점도 큰 문제로 떠올랐다. 산부인과 전문의 인력 풀을 여성에서만 찾아야하는 ‘반쪽’ 공급 상황에 놓인 셈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상급종합병원 관계자는 “빅5 병원에서조차 50~60대 교수 3~4명이 돌아가며 24시간 온콜(on-call) 대기를 할 정도인데 어떤 젊은 의사가 산과에 들어오겠냐”고 말했다. 그는 이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당직을 꺼려하고 응급상황이 많은 분만실 근무를 선호하지 않는 여자 의사들이 상대적으로 많다”며 “의료취약지역에 배치할 공중보건의사 등을 감안하면 남자 산부인과 인력이 더 늘어나야할 상황”이라고 말했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일각에선 불가항력적 분만 의료사고에 대한 소송 제기 우려도 산과를 기피하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설현주 강동경희대병원 산부인과 교수가 2020년 12월부터 2021년 1월까지 4년 차 전공의 82명ㆍ전임의 28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47%가 ‘전문의 취득 및 전임의 수련 이후 분만을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 중 79%는 ‘분만 관련 의료사고 우려 및 발생에 대한 걱정’ 때문이라고 답했다. 성원준 경북대병원 산부인과 교수에 따르면 평균 의료사고 해결 기간은 1435일(3.9년)로, 최소 276일에서 최대 12년이 걸렸다.

의료계에선 출생아 수 감소로 산부인과 수요가 줄면서 의료 공백이 발생, 다시 저출생이 가속화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오수영 성균관의대 산부인과 교수는 자신이 근무하는 삼성서울병원에서도 올해 처음으로 산과 펠로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면서 “분만 인프라 붕괴가 지방뿐 아니라 수도권까지 오고 있다. 저출산 기조가 이어진다고 하지만 현재 만혼으로 고위험 산모는 점점 늘어나 인력 수급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수가 개선 등 정부의 적극적인 유인책 마련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수가 현실화·의료 사고 시 국가 보상 비용 높여야

배진곤 계명대동산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지난달 국회 토론회에서  ▶산과ㆍ고위험분만 관련 수가 현실화 ▶정부ㆍ지자체ㆍ기관의 분만실 운영 의지 의무화 등을 제시했다. 배 교수는 “제왕절개 초산이 40만원인데 복강경하 담낭절제술이 93만원”이라며 “시간과 인력 소요가 비슷한 타과 수술에 비해 수가가 낮다”고 지적했다. 오수영 교수는 젊은 의사들을 불러올 유인책으로 “고강도 노동에 대해 제대로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박중신 대한산부인과학회 이사장(서울대병원 산부인과 교수)은 분만 시 불가항력적 의료 사고가 생겼을 경우 국가가 부담하는 보상 비용을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현재 분만 사고에선 3000만원의 범위에서 보상을 해주고 있는데 이를 일본처럼 3억원 정도로 올려 의사 개인에 대한 소송으로까지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최근 법원이 신생아 뇌성마비의 책임을 물어 의사 개인에게 12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난 사례를 언급하며 “이대로 간다면 10년 뒤엔 정말 분만할 수 있는 병원이 없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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