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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성식의 레츠 고 9988

사실혼 자녀 안 되고, 연 끊은 동생 된다…이상한 존엄사 결정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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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신성식 기자 중앙일보 복지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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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적십자병원 중환자실에서 의료진이 환자를 돌보고 있다. 김종호 기자

서울적십자병원 중환자실에서 의료진이 환자를 돌보고 있다. 김종호 기자

 지난달 중순 서울대병원 완화의료·임상윤리센터가 '연명의료 결정의 사각지대' 심포지움을 열었다. 이날 행사 토론자 조정숙 국가생명윤리정책원 연명의료관리센터장은 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11개월째 연명의료를 받는 생후 20개월 영아의 예를 들며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 아이는 지난해 11월 생후 9개월 때 30대 친모의 학대를 받아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고 충남대병원에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다. '임종 상태'라는 판정을 받고 혼수상태가 이어지고 있지만 이 아이의 고통을 멈출 방도가 없다.

30만 8923명 존엄사 이행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길민정 서울시 북부병원 의료사회복지사는 이날 심포지엄에서 사실혼 부부의 안타까운 사례를 소개했다. A씨는 사실혼 관계인 남편을 먼저 보내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20대, 남편 자녀로 등록)에 의지해 살다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아들이 가족인데도 법정 대리 결정을 할 수 없다. A씨에게는 수십 년 연락하지 않은 여동생이 있다. 현행법을 따르려면 여동생을 반드시 찾아야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다. A씨의 인생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데도 중요한 결정을 맡겨야 한다.

가족 변화 못 따르는 연명의료
친모 학대로 뇌사된 영아 고통
조카 보호자도 가족 포함 안돼
"법정 대리인제 도입 서둘러야"

 이날 심포지엄에서 가족이 환자의 뜻을 제대로 대신하지 못할 수도 있고, 일반적인 형태의 가족이 아닌 사각지대가 적지 않다는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르면 환자가 의사를 표현할 수 없을 때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연명의료계획서 같은 문서가 있으면 연명의료를 중단(유보)할 수 있다. 이런 게 없으면 가족 2명이 "환자가 인공호흡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확인(의사 추정)하면 가능하다. 환자의 뜻을 모르면 가족 전원이 합의한다. 가족은 19세 이상의 배우자·자녀·부모를 말한다. 이런 사람이 없으면 조부모·손자녀가, 이마저 없으면 형제·자매가 대신한다. 지난 5년 6개월 동안 30만8923명이 인공호흡기 치료 등의 7개 연명의료 행위를 중단(유보)하고 존엄사 했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연락 말라" "알아서 해라" 

 가족 구성이 점점 복잡해진다. 1인 가구나 독거노인이 급증하고, 연락이 두절됐거나 해외에 거주하는 경우도 많다. "알아서 해라" "연락하지 말라"며 의사 표시를 거부하는 이도 있다. 반면 가족 역할을 하는 조카가 있어도 연명의료 결정에 관여할 권한이 없다. 사실혼·동성 커플도 법적 권한이 없다.

 영아 사건의 경우 5월 법원이 친모에게 징역 4년 형을 선고하면서 친권을 정지하고 관할 구청을 후견인으로 지정했다. 병원 측은 선고 직전 친모에게서 연명의료 중단 동의를 받았다. 당시에는 친모의 친권이 있는 상태라 '가족 전원 합의' 과정에 하자가 없었다. 환자가 미성년자이면 법정대리인(친권자에 한정)이 의사 표시를 할 수 있게 돼 있다. "학대 주범에게 서명받는 게 옳으냐"는 논란이 일면서 동의서가 무용지물이 됐다. 구청은 생명권을 결정하지 못한다. 가정법원의 결정을 구하는 길밖에 없지만, 아직 움직임이 없다. 지금의 연명의료가 아이에게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는 걸까.
 조정숙 센터장은 다른 가족 사례를 소개했다. 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뇌사 상태에 빠져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병원 측은 임종 환자라고 판단해 연명의료를 중단했고 곧 숨졌다. 외국에 사는 자녀의 동의를 받았다. 이메일로 문서를 주고받았다. 중증 지적장애인인 다른 자녀, 이혼한 배우자는 제외했다. 조 센터장은 "가해자가 상해치상에서 상해치사로 혐의가 바뀌었다면서 연명의료 중단 절차에 이의를 제기하며 소송을 제기했다"고 말했다.

환자 가치관 아는지 안 따져 

서울동부병원 호스피스 완화 의료 병동에서의 한 장면. 중앙포토

서울동부병원 호스피스 완화 의료 병동에서의 한 장면. 중앙포토

 길민정 복지사는 '조카 보호자의 비애'를 강조했다. 환자의 형제가 숨졌거나 치매를 앓고 있고 환자의 유일한 혈육인 조카가 보호자 역할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한다. 조카는 법적 가족에 해당하지 않는다. 또 형제처럼 지내던 친구도 대리 결정에 참여하지 못한다.
 가족 2명이 환자의 의사를 추정하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 나왔다. 환자의 녹음이나 일기장 같은 객관적·구체적 증거가 없어도 된다. 심수현 서울대병원 법무팀 변호사는 "가족 2명 이상의 일치하는 진술만 있으면 환자의 의사로 추정하는데, 그 근거가 매우 빈약하다"며 "환자의 평소 가치관을 알 수 있을 정도의 관계를 유지했는지, 진술 시기가 적합하고 신뢰할만한지 등을 전혀 따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황당한 경우도 있다. 환자가 의식이 있을 때 의료진에게 "계속 치료해 달라"고 얘기하고 의식이 없어졌는데, 가족 2명이 "환자가 연명의료를 원하지 않았다"고 진술하면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 센터장은 "나쁘게 말하면 두 사람이 짜더라도 법적으로 문제가 안 된다. 양심에 호소할 뿐"이라고 말한다. 심 변호사는 "가족 2명의 권한 남용을 견제할 장치가 없다"고 말했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심 변호사는 "현행 법률의 대리 결정권자를 가족으로 한정하지 말고 환자의 평소 선호도와 가치관을 아는 사람을 포함하고, 최선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거나 권한을 포기한 가족, 연락 두절 가족 등은 대리 결정에서 빼야 한다"고 말했다. 또 환자가 지정한 대리인, 임의후견인, 성년후견인 등을 대리 의사 결정권자에 포함하고 이런 이가 없으면 병원윤리위원회가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조정숙 센터장은 "현행 법률에서 규정하는 가족은 '정상적인 가정'으로 제한된다. 그렇지 않은 가족이 느는데 지금의 틀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법정 대리인을 미리 지정하는 제도가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신성식 복지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