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송호근의 세사필담

동학이 항일투쟁이라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줏대 없다는 뜻의 좌고우면이 꼭 필요할 때가 있다. 정치권이 역사적 사건을 평가할 경우다. 야당은 홍범도 논란이 가라앉기도 전에 이번에는 동학(東學)을 불러들였다. 국회 상임위 소위에서 강행 처리된 동학법 개정안은 직선적이고 거칠다. 1894년 동학농민봉기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대우하고 ‘고손(高孫)’까지 교육·취업·의료 혜택을 부여한다는 것.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기에” 독립유공자, 130년 전 일이라 고손이라 했다. 족보를 뒤지고 고조부 행적을 찾아 나서야 할 판이다.

정치적 의도로 역사 덧칠은 금물
동학법 개정안은 동학 본질 이탈
제폭구민 척왜양 투쟁 불사했지만
사민평등 자각한 종교개혁이 본질

문체부 산하 ‘동학위원회’에 등록된 사람은 동학운동 참여자 3745명, 유가족은 1만3000여 명이다. 까마득한 옛일이기에 선대 증언과 구전을 수집해 더 청구하라 했다. 유가족이 수만 명 늘 수 있다. 동학군의 흔적이 남한 도처에 널려 있어서다. 당시 참전했던 오지영의 진술에 의하면, 공주 우금치 전투(1894년 10월)에서 2만여 명이 전사했다(『동학사』). 임실에 거주했던 황현은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섬진강 전투를 꼽았다(『오하기문』). 강진과 장흥 지역 1만여 동학군은 대구까지 진격했다가 돌아오는 길에서 섬진강에 매복한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총에 맞아 익사한 시체가 섬진강을 피로 물들였다고 황현은 썼다. 나주전투에서는 “관군이 농민군 2만여 명의 목을 벴다”고 했다.

대체 농민군 전사자는 어느 정도일까? 『천도교 창건사』는 20만 명 이상,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30만 명, 오지영은 30만~40만 명으로 추산했다. 경기도 이남 지역 성인 남자의 거의 10%에 근접하는 규모다. 농민군의 상대는 주로 관군, 수성군, 민보군이었다. 고부봉기, 무장기포, 정읍 황토현 전투와 전주성 함락까지 관군 및 향토군과 싸웠다. 일본군이 개입한 것은 청일전쟁 발발로 조선 섭정관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청국으로 달아난 이후다. 아산만 해전(동년 6월), 평양성 전투(8월)에서 청군을 대파한 일본군은 갑오내각의 요청을 받고 동학군에 눈을 돌렸다. 우금치, 청주, 섬진강전투에서 농민군 주력이 일본군과 맞닥뜨린 배경이다.

2대 교주 최시형 편 『용담유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개 같은 왜적 놈들 물리치고”, “대보단에 맹세하여 양이(洋夷) 원수 갚아보세”(「안심가」). 1894년 봄 백산 결의문엔 사람존중, 성군질서, 왜양과 권귀(權貴) 축멸을 선포했고, 전봉준이 작성한 걸출한 문서인 『무장포고문』 역시 교조신원, 탐관오리 척결, 척왜양 순으로 대의를 밝혔다. 외세를 물리쳐 반듯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강성 민족주의의 원류로 해석하는 것은 좋으나,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는 의도적 강조는 본말전도에 해당한다. 학계에서 그토록 경계한 운동권적 역사편집이다.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은 3천 관군과 2천 일본군 연합부대와 싸웠는데 그게 항일투쟁인가?

독립유공자가 되려면 농민군의 가슴 속에 ‘항일투쟁’이라는 푯대가 휘날려야 한다. 죽창과 괭이를 들고 무장(남접)과 보은(북접) 집회에 자진 모여든 농민군의 내면에 독립과 항일이 있었을까? 화승총을 들고 일본군의 개틀링 기관총 앞으로 돌진한 의기는 무엇이었을까?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인 1만여 명 농민군 뇌리엔 우선 제폭구민(除暴救民)이 각인돼 있었다. 지배층의 수탈에서 가족생계를 구하려던 민중들이었다. 그것을 가로막는 외세는 물론 외세를 불러들인 조정도 적이었다. 보국안민(輔國安民)이 그래서 나왔다.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한 힘은 내면의 소리, 즉 동학교리였다.

동학은 이들에게 한울님의 목소리를 들려줬고 시천주(侍天主)하면 영생불멸한다는 믿음을 심어줬다. 그들은 동학교도였다. 동학은 서학(서교)에 대항한 학문이자 천도를 인민의 것으로 만든 민중 종교였다. 한울님이 영부와 선약을 내렸다. 형상은 태극이고 궁궁(弓弓)이었다. 영부를 받고 주문을 외우면 질병이 나았고 천심에 이른다. 궁궁촌은 민간이 갈망하는 낙원이고, 만사가 조화를 이루는(造化定) 이상향이다. 일본군에 돌진하는 농민군은 ‘궁궁’이라는 부적을 가슴에 달면 총알이 피해간다고 믿었다.

한울님이 내 가슴 속에 내려앉자 지배층의 종교가 나의 종교가 됐다. 사민평등에 눈을 떴고 모두가 하늘이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이 싹텄다. 동학은 조선 최초의 ‘종교개혁’이었다. 마치 유럽 중세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solafide)라는 깨달음으로 종교개혁을 출범시킨 과정과 흡사하다. 창교자 최제우가 루터라면, 해월 최시형은 개신 교리를 전파한 칼뱅이고, 전봉준은 농민전쟁을 지휘한 뮌처였다. 독립유공자 운운 논리는 동학의 역사적 지평을 민족주의 오솔길로 격하하는 발상이다.

동학법 개정안을 발의한 의원의 지역구가 정읍이라고 하는데, 정읍 황토현 전투(4월)에는 청군도 일본군도 없었다. 1907년 구식 군대 해산 전후 의병운동이야말로 독립항쟁의 보고(寶庫)다. 그들 대부분 산야에서 죽었기에 기록이 없다. 이건 향촌야사까지 뒤질만 하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