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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영정사진, 채워진 소주 한잔…매일 4번 반복되는 이 장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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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고 힘들어서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영원히 가신 길이 아쉬워 이렇게 술 한잔 올려드렸습니다. 잠시 후면 장지로 떠납니다.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으나 고이 길 떠나소서.”

추석 연휴를 이틀 앞둔 지난달 26일 오전 10시. 비영리단체 관계자와 자원봉사자 13명이 나지막이 조사(弔詞)를 읊었다. 2평 남짓한 빈소에는 위패 2개가 놓였다. 영정사진이 있어야 할 액자는 텅 비어있었다. 위패의 주인은 8월 12일 병원에서 사망한 60대 A씨, 8월 21일 자택에서 숨진 B씨였다. 이들은 모두 시신을 인수하겠다고 나서는 가족이 없는 무연고 사망자다.

잠시 후 A씨와 B씨의 시신이 안치된 나무관이 운구 카트에 실려 화장터로 옮겨졌다. 1시간 30분 뒤 화장터에서 나온 시신은 한 줌의 재가 돼 봉안함에 담겼다. 오후 12시 30분, 시신을 승화원 내에 있는 ‘무연고 추모의 집’ 봉안하는 것으로 2시간 30분 간의 짧은 장례는 끝이 났다.

추석을 나흘 앞둔 지난 26일 서울시립승화원 내 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 빈소 '그리다'에서 장례지원 비영리단체 '나눔과나눔' 관계자와 자원봉사자들이 무연고 사망자 A, B씨의 장례를 치르고 있다. 이영근 기자

추석을 나흘 앞둔 지난 26일 서울시립승화원 내 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 빈소 '그리다'에서 장례지원 비영리단체 '나눔과나눔' 관계자와 자원봉사자들이 무연고 사망자 A, B씨의 장례를 치르고 있다. 이영근 기자

2018년 서울시가 마련한 승화원 내 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 빈소 ‘그리다’에선 매일 이런 무연고 사망자들의 장례가 치러진다. 가족이 있더라도 재정적 어려움과 관계 단절을 이유로 시신 인수를 거부하거나, 연고자가 아예 없거나 연락이 두절된 경우에 A씨 같은 무연고 사망자가 된다. 보건복지부가 김원이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무연고 사망자는 2019년 2665명, 2020년 3136명, 2021년 3603명, 지난해 4842명으로 매년 증가세다. 2015년부터 공영 장례를 치른 비영리단체 나눔과나눔의 박진옥 이사는 “한때는 주중 장례가 없는 날도 있었는데 지금은 매일 하루 4명씩 꼬박 장례를 치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무연고 사망자들의 죽음이 같은 건 아니다. 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 빈소 벽 한 켠엔 “작년엔 사과밭에 같이 가고 그땐 정정하셨는데 하늘에선 편히 쉬세요”라는 내용이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2015년부터 무연고 사망자 장례를 치른 비영리단체 나눔과나눔의 박진옥 이사는 “무연고 사망자라고 해서 이들의 삶을 외로웠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가족이 해체됐더라도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살아오신 분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강명훈(37)씨도 “지난주 치른 장례에선 고인의 지인들로 빈소가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했다.

 서울시립승화원 내 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 빈소 '그리다' 벽에 붙은 무연고 사망자 지인의 추모 메시지. 이영근 기자

서울시립승화원 내 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 빈소 '그리다' 벽에 붙은 무연고 사망자 지인의 추모 메시지. 이영근 기자

반면 사회적 관계조차 형성하지 못한 이들도 승화원에 온다. 이름도 없이 베이비박스에 놓여 사망했거나 병원에서 짧은 생을 산 아이들이 대표적이다. 부모 대신 간호사가 빈소를 찾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박 이사는 “시민이 참여하는 장례가 공영 장례의 핵심”이라며 “생전 알지 못했던 이들이라도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다양한 이들이 모여 사별자로서 고인을 배웅하는 모습이 공영 장례의 근본 취지가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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