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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오듯 법원 온 지지자들…"창원간첩단, 민노총보다 급 높다"

중앙일보

입력

지난 1월 18일, 국가정보원과 경찰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을 대대적으로 압수수색했다. 핵심 타깃이 된 서울 정동 민주노총 본부엔 경찰 700여 명이 투입됐고, ‘국가정보원’ 조끼를 입은 국정원 직원들은 이례적으로 카메라 앞에 대거 노출됐다. 진입을 막아선 민주노총 측과 수사당국의 잦은 충돌로 현장은 금세 아수라장이 됐다. “지난 정부의 남북평화 기조 아래 멈춰있던 간첩 수사의 재개를 알리는 신호탄(안보수사당국 관계자)”이었다.

지난 1월 '간첩단 의혹'과 관련해 압수수색을 마친 국가정보원 관계자들이 18일 오후 서울 정동 민주노총에서 압수물품을 들고 나오고 있다. 뉴시스

지난 1월 '간첩단 의혹'과 관련해 압수수색을 마친 국가정보원 관계자들이 18일 오후 서울 정동 민주노총에서 압수물품을 들고 나오고 있다. 뉴시스

이날 압수수색 대상이 됐던 석모 전 민주노총 조직쟁의국장과 김모 전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 조직실장, 양모 전 민주노총 금속노조 부위원장(광주 기아차지부), 신모 제주평화쉼터 대표는 모두 ‘민주노총 침투간첩단’으로 묶여 지난 5월 수원지검에서 재판에 넘겨졌다.

조합원 수만 120만명 이상인 거대 조직 민주노총의 전·현직 간부들이 북한 간첩이었다는 의혹은 큰 파장을 낳았다. 정치권과 대북단체 등으로부터 관심을 한몸에 받았고, 평택미군기지와 오산공군기지 등 군사시설의 기밀정보를 수집한 혐의로 입증이 까다로운 ‘간첩죄’(국가보안법 제4조)까지 적용됐다.

신발 사장이 총책…창원간첩단은 누구

이런 민주노총 사건에 비하면, 지난 3월 서울중앙지검이 재판에 넘긴 ‘창원간첩단(자주통일민중전위, 자통)’ 사건은 인지도가 높지 않다.

'창원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는 경남진보연합 관계자들이 지난 1월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창원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는 경남진보연합 관계자들이 지난 1월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안보수사당국에 따르면 자통은 2016년 북한의 지령을 받고 총책 황모씨, 경남진보연합 정책위원장 성모씨와 교육국장 정모씨 부부, 김모 5·18민족통일학교 상임운영위원장 등 4명이 경남 창원을 중심으로 설립한 조직이다.

국정원과 경찰은 내사를 거쳐 지난해 11월 이들의 자택과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하며 공개수사로 전환했다. 수사 결과 자통은 민주노총·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전국교직원노조(전교조) 등에 전국 68개 하부망을 운영해온 대규모 조직이었는데, 그 심각성은 널리 주목받지 못했다. 서울대 독문과 출신인 총책 황씨의 당시 직업은 창원의 신발제조업체 ‘S상사’ 대표였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소풍 같은 ‘대기 투쟁’…민주노총 재판은 조용

그러나 최근 재판 현장에서 보이는 두 간첩단의 위상은 인지도와는 크게 다르다. 자통 사건은 비공개 재판에도 지지자가 몰려들고 재판이 계속 지연되는 반면, 민주노총 사건 재판은 별다른 소동 없이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자통 사건 3차 공판과 보석 심문이 예정됐던 지난달 11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서관 입구에선 남녀노소 40여명이 계단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저번에도 오셨던 분이죠?” “아유, 내일은 출근이네요” 등의 담소를 나누는 장면이 목격됐다. 재판의 공개 여부도 모른 채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기다리던 재판이 갑자기 취소됐는데도 짜증내는 기색이 없었고, 해산 직전엔 인솔자의 안내에 따라 단체 사진도 촬영했다.

지난달 11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서관 앞에서 창원간첩단(자통)의 공판기일 변경 사실을 알게 된 지지자들이 단체사진을 찍으러 이동하고 있다. 김정민 기자

지난달 11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서관 앞에서 창원간첩단(자통)의 공판기일 변경 사실을 알게 된 지지자들이 단체사진을 찍으러 이동하고 있다. 김정민 기자

자통 재판에선 장외 투쟁도 재현되고 있다. 지난 8월 첫 공판 땐 100여 명이 국가보안법 폐지 집회를 열었다. 2차 공판일엔 열댓 명이 비공개 법정 밖 대기석에서 법원 경위들의 삼엄한 감시 아래 책을 읽거나 휴대전화를 보며 말없이 자리를 지켰다. 재판을 볼 수 없는데도 법정 주변이 늘 문전성시인 것이다.

반면 ‘민주노총 침투간첩단’을 심리 중인 수원지법은 사뭇 다른 분위기다. 민주노총 70여 명이 국가보안법 폐지 집회를 연 공판 첫날(8월 14일)을 제외하면,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국정원 진술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재판 내용을 공개하는데도 방청객은 대개 5~6명에 그친다. 자통 재판은 밀리고 중단되길 반복하고 있지만 이 사건은 이달에만 7번의 재판이 열린다.

지난달 18일 경기도 수원 영통구 수원지법 201호 법정에서 열린 민주노총 침투간첩단 사건 6차 공판은 방청객 5~6명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정숙하게 진행됐다. 김정민 기자

지난달 18일 경기도 수원 영통구 수원지법 201호 법정에서 열린 민주노총 침투간첩단 사건 6차 공판은 방청객 5~6명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정숙하게 진행됐다. 김정민 기자

“자통은 수괴급…북한 문화교류국과 직통”

안보수사당국은 이런 분위기 차이가 ‘북한 내 서열’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익명을 요구한 안보수사 관계자는 “같은 문화교류국 산하라도 자통(창원간첩단)은 문화교류국과 직통하는 사이고, 민주노총 측은 한 단계 경유가 필요하다”며 “자통이 더 수괴급이니 재판 때마다 장외 투쟁 세력이 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화교류국은 북한이 운영하는 여러 비합법 대남공작부서 가운데 역사가 가장 오래된 조직으로, 김정은이 직접 지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달 11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서관 앞에서 창원간첩단(자통)의 공판기일 변경 사실을 알게 된 지지자들이 단체사진을 찍으러 이동하고 있다. 김정민 기자

지난달 11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서관 앞에서 창원간첩단(자통)의 공판기일 변경 사실을 알게 된 지지자들이 단체사진을 찍으러 이동하고 있다. 김정민 기자

자통 사건에는 재판을 늦추는 다양한 소송 기술들도 망라되고 있다. 다른 간첩 사건들에도 흔히 쓰이는 국민참여재판 신청에 그치지 않고, 보석 신청과 재판부 기피 신청, 위헌심판 제청 신청 등이 반복적으로 이뤄진다. 최근엔 담당 판사(강두례 부장판사)를 허위공문서 작성 혐의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고발하기도 했다.

실제 2차 공판 이후 진전이 없는 자통에 비해, 민주노총 사건은 두 달 늦게 기소됐는데도 벌써 7차례 공판이 열렸다. 한 공안검사는 “자통을 맡은 장경욱 변호사는 이미 수차례 간첩 사건을 맡아 같은 소송 기술들을 반복해 왔다”며 “실제 재판이 본격화할 때쯤이면 구속기한이 만료돼 피고인 4명 모두 불구속 상태로 재판받을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자통엔 간첩죄 미적용…“증거인멸 기술 차이”

이처럼 서열이 더 높다고 평가받는 자통에 간첩죄가 적용되지 않은 것 역시, 더 철저한 관리 때문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공안검사 출신 변호사는 “유력 방산업체들과 군사안보시설이 밀집한 창원에 거점을 둔 만큼, 국가기밀 탐지·수집에 대한 수요도 있었을 것”이라며 “자통 쪽의 증거인멸이 철저해 검찰의 증거 수집이 어려웠을 거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사건은 간첩 사건에선 이례적으로 형법상 범죄단체활동죄가 적용됐는데, 수사기관이 자통의 조직 성격이나 행위를 중요하게 보고 엄벌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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