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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막 내린 ‘오에 겐자부로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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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일본 도쿄에서 최근 열린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선생의 고별식에 참석했다. 1994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그는 지난 3월 3일 88세 나이로 별세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올해까지 필자가 오에 선생의 작품 다섯 권을 한국에 번역, 소개한 인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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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선생이 인류 구원의 메시지를 담았던 푸른 나무를 세워 둔 데이고쿠(帝國)호텔 고별식장에는 언론·문화·출판인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고별식 발기인 대표인 작가 시마다 마사히코는 “오에 선생의 반골 정신과 이단적 사상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면서 계승을 다짐했다. 그의 말대로 현대 일본에는 그런 정신이 분명히 존재했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전후 일본 양심세력 급감 추세
한국도 피해자 의식 씻어낼 때
대등한 한·일관계가 미래 열어

하지만 오에 겐자부로라는 인물이 제국주의·전제주의 일본을 반성하며 출발한 ‘전후 일본’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던 만큼 필자에게는 그의 작고가 일본의 어떤 변곡점을 시사하는 듯했다. 오에 선생은 20대에 등단해 인생 전반에 걸쳐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핵 문제를 비판했던 작가여서다.

동일본대지진 발생 2년 후인 2013년에는 노구를 이끌고 핵 발전소 반대 시위에 앞장서 6만 명 군중 앞에서 연설했다. 반성하는 ‘전후 일본’을 지탱해 온 1960년대 전공투(全共闘) 세대가 대거 참여해 이끈 마지막 운동으로 보였다. 전공투 세대는 이제 노령화돼 이전만큼 활동이 활발하지는 않다.

식민지 문제가 대두한 이후 피해자 편에 서서 일본 정부가 사죄에 나서도록 촉구해 온 세대는 이제 더는 젊지 않다.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별개로 하더라도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이제 ‘오에와 전공투 세대가 부재한 일본’이다.

그동안 우리가 의지해 온 이른바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시민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반성하는 나머지, 한국 측 주장이라면 일부 문제가 있어도 거의 무조건 지지해 왔다. 문제는 그렇게 만든 건 과거의 지배받는 식민지인들에 대한 온정주의적 감정이라는 점이다.

그런 미묘한 한·일의 불평등 관계는 역사 문제를 마주해 온 지난 30여년간 유지됐다. 한국에서 악명 높았던 아베 신조 총리와는 서 있는 곳이 다르지만, 이른바 양심적 지식인·시민들이 분열하면서 그 일부가 조금씩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도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보와 극우의 이념적 양극단이 소수화된 일본 사회의 변화를 직시하고, 한국은 일본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피해를 분명히 말하되, 때로 비합리적 태도마저 허용하는 피해자 의식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가해자들의 석연치 않은 감정을 살피는 여유도 이제 필요하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행보는 기본적으로 일본과 대등한 입장에서 과거사 문제는 물론 현재의 정치·경제 문제와 마주해 온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이 한·일 관계를 획기적으로 회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 결과라 봐야 할 것이다.

징용 소송 원고 측은 “한국 정부는 징용 문제에 이해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며 제삼자 변제를 위한 법원 공탁을 거부한다. 하지만 작금의 징용 소송에서 피해자들이 기업의 배상을 받는다 해도 일본 정부의 사죄는 따라오지 않는다. 그에 비해 제삼자 변제라는 선택지엔 일본 정부의 사죄를 끌어낼 가능성이 남아 있다. 30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못한 위안부 문제로 인해 마음을 닫은 일본 정부와 국민이 과거에 보여준 관심과 전향적 태도를 징용 문제나 간토(關東) 대지진 문제에서도 끌어낼 수 있는 방향이기도 하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이웃 나라 일본을 넘어선 전체 인류의 재앙으로 간주하면 같은 바다를 사이에 둔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서 원전 오염수(처리수) 문제를 넘어설 방도를 함께 모색할 수도 있다.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후대는 물론 전 세계를 향해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이 따라올 것이다.

신뢰에 기반을 둔 한·일 관계는 간토 대지진 희생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와 국민의 관심 촉구, 재일동포의 참정권 획득을 위해서도 이어져야 한다. 대등한 한·일 관계를 만들 수 있는 건 사안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끊임없는 대화뿐이다. 한국 드라마를 대부분 봤다는 시마다 작가의 말 역시 그런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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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