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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가드레일에 국내 업계 “최악 피했지만”…‘中 출구’ 고민은 더 커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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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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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은 피했지만 시름은 깊어진다-. 지난주 미국 상무부가 발표한 반도체지원법(칩스법) 가드레일 최종 규정에 대해 국내 반도체 업계의 속사정은 이렇게 요약된다. 현재 가동 중인 중국 공장을 당장 중단하거나 사업을 철수할 정도로 치명적이진 않지만 ‘미래 기약’이 어렵다는 진단에서다.

24일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최종안이 지난 3월 미 정부가 공개했던 가드레일 세부 규정과 큰 차이가 없다. 더 강화되지 않아 다행”이라면서도 “세부 내용에 대한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고 조심스러운 입장을 밝혔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은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다.

가드레일 최종안에 따르면 미 정부는 기업이 보조금 수령 시점부터 10년간 중국 등의 공장에서 생산능력을 ‘(허용치 이상으로) 실질적으로 확장하는 중대한 거래’를 할 경우 보조금 전액을 반환하도록 했다. 실질적 확장은 웨이퍼 기준으로 첨단 반도체는 5% 이하, 28나노미터(㎚·10억 분의 1m) 이전 세대의 레거시(구형) 반도체는 10% 미만이다.

앞서 정부는 미국 측에 ▶실질적 확장 기준 5→10%로 상향 ▶레거시 반도체의 범위 완화 등을 요청했지만 사실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 상무부는 “5% 예외만으로 반도체 시설과 생산라인의 일상적인 업그레이드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밝혔다.

정근영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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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파운드리 공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테일러에 제2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다. SK하이닉스의 경우 미국에 후공정 공장 건립을 계획하는 단계로, 당장 보조금 혜택 대상은 아니다. 중국에서는 삼성전자가 시안공장에서 자사 낸드플래시의 40%가량을 생산 중이다. SK하이닉스는 우시 공장에서 D램의 40%를, 인텔에서 인수한 다롄 공장에서 낸드플래시의 20%를 각각 생산하고 있다. 가드레일 조항이 삼성전자에 더 민감하다는 의미다.

정부는 안도하는 입장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안보적 우려가 없는 (한국 기업의) 정상 경영 활동은 보장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혔다. 또 지난 3월 발표한 가드레일 초안에선 생산능력 5% 초과 확장 시 투자금액 한도가 ‘10만 달러(약 1억3400만원)’였지만, 최종안에선 제한 금액 없이 미 상무부와 협약을 통해 결정하도록 한 점이 기업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생산능력(웨이퍼 투입량) 기준을 반도체 시장의 계절적 변동을 고려해 월→연 단위로 바뀐 점 ▶현재 구축 중인 설비도 상무부와 협의 때 예외로 인정받게 된 점 등이 진전된 내용이라고 덧붙였다.

실질적 확장의 범위도 초안에선 ‘물리적 공간이나 장비 등을 추가해 생산능력을 5% 이상 확대하는 것’으로 정의했지만, 최종안에서는 ‘장비’ 대신 ‘클린룸·생산라인이나 기타 물리적 공간’으로 바뀌었다. 생산량 확대는 규제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이미 중국 공장의 생산량은 최대치인데, 공간이 있어도 공장을 더 짓지 말라는 의미로 보인다”며 “업계의 요구는 애초부터 증산보다는 최신 제품 제조로 업그레이드였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보지만은 않는다”고 말했다.

황철성 서울대 재료공학부 석좌교수는 “삼성전자만 해도 지난 10년간 시안 공장의 웨이퍼 투입량이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5% 허용은 확장하지 말라는 의미로 보인다”면서도 “다만 같은 웨이퍼에서도 칩 사이즈를 조정하는 등 공정기술 개선을 통해 현상 유지는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최근 중국 화웨이가 발표한 신형 5세대(5G) 스마트폰 ‘메이트60 프로’에서 SK하이닉스의 D램·낸드플래시가 나오며 미국 측의 추가 제재 우려가 컸는데 “이만하면 선방했다”(업계)는 평가도 나온다.

다만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미국 정부가 지난해 10월부터 자국 기업이 중국 반도체 제조 기업에 반도체 장비 수출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삼성전자·SK하이닉스는 1년간 한시적 통제 유예를 받았는데, 내달 유예 기간 종료를 앞두고 한·미 양국이 협상을 이어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에 장기적 퇴로를 고민하면서도 미·중의 정세 변화를 살펴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용석 성균관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는 “미국은 ‘중국 내 생산을 더는 늘리지 말라’는 메시지 보낸 것”이라면서도 “증산과 별개로 장비 업그레이드를 위해서는 내달 장비 수출통제 유예를 받는 게 중요하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중장기적으로 대규모 투자나 확장이 어렵다는 점에서 국내 기업들도 퇴로를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황철성 교수는 “미·중 경쟁이 심화해 중국 내 반도체 제조뿐 아니라 판매까지 규제한다면 상황이 심각해질 것”이라면서도 “다만 산업계에선 반발이 커지고 있다. 상황이 바뀔 수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박재근 한국 반도체 디스플레이학회장(한양대 석학교수)은 “미국의 ‘첨단 반도체 5%’ 제한은 인공지능(AI) 등 신산업에서 중국의 성장을 막으려는 시도로 본다”며 “국내 기업에 더 중요한 건 내달 미국의 반도체 장비 수출 제한을 추가 유예하는 것이다. 반도체업 특성상 장비 업그레이드를 하지 못하면 레거시 반도체만 제조할 수밖에 없어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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