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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에 웬 유통기한? 낡은 빌딩을 '힙게소' 만든 이 타일 회사[비크닉]

중앙일보

입력

지난 15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재 거리에 큰 장이 섰습니다. 가구 거리로 불리는 논현동 일대는 차량 통행은 잦아도 유동 인구는 많지 않은 거리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일까요. 학동역 인근 한 빌딩으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듭니다.

지난 13일부터 닷새간 열린 윤현상재 ‘유통기한 프로젝트-종이(PAPER)’ 프로그램 중 푸드 마켓 현장. 사진 윤현상재

지난 13일부터 닷새간 열린 윤현상재 ‘유통기한 프로젝트-종이(PAPER)’ 프로그램 중 푸드 마켓 현장. 사진 윤현상재

건물의 이름은 문영빌딩. 1988년 서울 올림픽과 함께 태어난 이 낡은 빌딩에는 ‘EXP:8 SEASON’ ‘EXP:2025.5.26’이라는 암호문 같은 글자가 적혀있습니다. ‘EXP’는 유통기한(Expiry date)의 약자. 즉, 8 계절이 지나 2025년 5월 26일까지가 건물의 유통기한이라는 뜻이네요.

건물에 유통기한이라니, 재미있죠. 오늘 비크닉은, 이 빌딩에서 ‘유통기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타일 회사 ‘윤현상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왜 타일 유통 회사가 강남 한복판에서 문화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지, ‘스몰 브랜딩 성공사례’로 꼽히는 윤현상재의 이모저모를 취재했습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문영빌딩. 신축까지 남은 여덟 계절, 8개의 이야기가 펼쳐질 예정이다. 사진 이정우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문영빌딩. 신축까지 남은 여덟 계절, 8개의 이야기가 펼쳐질 예정이다. 사진 이정우

‘종이’를 주제로 작가·브랜드 한 데 모이다

지난 주 찾은 문영빌딩은 ‘유통기한 프로젝트’ 두 번째 이야기로 성황이었습니다. 9월 13일부터 17일까지 5일간 열린 기획전 ‘종이(PAPER)’가 열리면서죠. 일상 재료인 종이를 주제로 기획전과 브랜드 팝업, 푸드 마켓이 열려 5일간 약 4000여명이 방문했다고 합니다.

 3~4층에서 열린 브랜드 팝업 중 '소소문구'의 전시. 한 관람객이 전시물을 감상하고 있다. 사진 윤현상재

3~4층에서 열린 브랜드 팝업 중 '소소문구'의 전시. 한 관람객이 전시물을 감상하고 있다. 사진 윤현상재

낡은 건물은 생기로 가득했습니다. 우선 1층엔 ‘마더 그라운드’ 카페와 성수동의 유명 문구점 ‘포인트 오브 뷰’의 팝업 스토어가 자리했습니다. 포인트 오브 뷰는 올해 12월까지 열리는 팝업 스토어로, 역시 ‘종이’를 주제로 여러 문구를 전시·판매하고 있었습니다.

건물 뒤편 주차장에선 15일부터 17일까지 주말을 이용해 ‘푸드 마켓’이 열렸습니다. 금미옥 떡볶이, 우리집 젤라또, 우보농장 토종쌀 등 약 30여개의 식음 브랜드들이 함께했고요. 한 가운데 마련된 평상에는 갖가지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해, 도심 한복판에서 열리는 정겨운 ‘장날’ 같은 풍경을 만들어냈습니다.

1층 브랜드 팝업 자리에 들어선 '포인트 오브 뷰'. 12월 30일까지 열린다. 사진 이정우

1층 브랜드 팝업 자리에 들어선 '포인트 오브 뷰'. 12월 30일까지 열린다. 사진 이정우

2층에는 윤현상재의 ‘자재 라이브러리(도서관)’가 자리합니다. 작은 타일부터, 돌덩어리까지 인테리어에 쓰이는 자재들을 망라하는 공간이죠. 3~4층에는 이번 기획전의 하이라이트, 브랜드 팝업이 이어집니다. 어쩌다책방·두성종이·소소문구·종이화원 등 종이를 주제로 다양한 작가 및 브랜드의 전시와 판매가 이뤄지는 공간입니다.

공실로 비워두느니 놀아볼까?

둘러보고 보니 이 매력적인 공간이 더 궁금해집니다. 군데군데 세월의 더께가 묻은 낡은 빌딩이 어떻게 이렇게 ‘힙’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는지 말이죠.

문영빌딩은 윤현상재가 새 사옥을 짓기 위해 매입한 건물입니다. 신축 공사까지 어쩌다 보니 2년간의 휴지기가 발생했고, 그냥 비워두느니 재미있게 놀아보자는 순수한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유통기한 프로젝트’죠.

2년의 생을 추가로 얻은 문영빌딩은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부동산·약국·가구 쇼룸·커튼 가게·회계 사무소 등이 들고 나던 건물이었습니다. 지금은 ‘포인트 오브 뷰’ 팝업 스토어로 꾸려졌지만, 1층 전면 가운데 공간은 얼마 전까지 약국이 남아 마지막 영업을 하고 있어 더 눈길이 갔죠. 인생사처럼 건물에도 생과 사의 우여곡절이 있는 것처럼 보였달까요.

유통기한이 있기에 최소한의 손길만 더해 건물을 수선했다. 사진 윤현상재

유통기한이 있기에 최소한의 손길만 더해 건물을 수선했다. 사진 윤현상재

윤현상재의 유통기한 프로젝트는 무미건조한 강남 한복판, 잠깐 들러 거닐어 볼 수 있는 문화 휴게소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시한부 건물이기에, 최소한의 노력을 들여 꾸민 공간 내부도 날것의 매력이 가득하고요. 나무 난간이며, 계단참에 붙은 거울이며 곳곳에 드러난 옛 건물의 정취가 볼만했죠.

물론 낡은 공간을 채우는 새로운 이야기가 무엇보다 눈길을 끌었습니다. 한 가지 주제 아래 현재 전시·디자인 업계의 내로라하는 작가들과 브랜드가 모여들어 저마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니까요. 지난 5월에도 첫 번째 프로젝트의 주제 ‘로컬리티(locality·지역성)’에 맞춰 각 지역의 유산을 담은 라이프 스타일 전시가 펼쳐졌습니다.

지난 5월 열린 첫번째 프로젝트 '로컬리티'에서 스페이스 비이가 선보였던 기획전. 사진 윤현상재

지난 5월 열린 첫번째 프로젝트 '로컬리티'에서 스페이스 비이가 선보였던 기획전. 사진 윤현상재

브랜딩 맛집, 윤현의 ‘남다름’

‘그런데, 타일 유통 회사가 왜 이렇게까지...’ 공간을 탐색하는 내내 머릿속에 떠다녔던 물음표였지요. 윤현상재는 1996년 논현동 가구거리에서 탄생한 건축 자재 유통회사입니다. 당시 보기 어려웠던 수입 타일 위주로 소개해 인테리어 업자들 사이에서 ‘타일 맛집’으로 불렸다고 하네요.

단순한 타일 유통 회사로 남을 수도 있었지만, 지난 2011년 리브랜딩을 하면서 ‘스페이스 비이(SPACE B-E)’라는 하위 브랜드를 만듭니다. 재료를 다루는 회사이기에 무엇인가가 되어가는 과정(Become)을 담겠다는 의미로요. 타일만이 아니라 건축과 집, 나아가 예술과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 플랫폼 브랜드죠. 사옥 3~4층에 동명의 갤러리를 만들고, 여러 예술가와 디자이너, 건축가들과의 협업 전시를 선보였습니다.

스페이스 비이에서 열린 57번째 기획 전시, 'Dancing Grid'. 사진 윤현상재

스페이스 비이에서 열린 57번째 기획 전시, 'Dancing Grid'. 사진 윤현상재

언뜻 타일 파는 것과 관계없어 보이는 스페이스 비이의 전시는 곧 입소문이 났죠. 윤현상재의 주요 고객인 건축가와 디자이너, 공간 기획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전시를 거듭하면서 이어진 감각 있는 예술가들과의 교류는 윤현상재의 큰 자산이 됐고요.

10만명 몰린 ‘보물창고’  

특히 지난 2014년부터 개최된 오프라인 플리마켓 ‘보물창고’는 윤현상재를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던 히트 콘텐트였습니다. 재고 타일을 팔아보자는 단순한 기획으로 윤현상재의 창고가 있었던 경기도 광주에서 열린 첫 번째 보물창고는 일대 교통이 마비되면서 안전상의 이유로 강제 중단됐을 정도로 화제가 됐죠.

이후 보물창고는 매회 새로운 콘셉트 아래 소규모 브랜드와 작가, 디자이너들의 부스가 차려지고, 온갖 먹을거리 브랜드가 동원되면서 한바탕 ‘문화 축제’처럼 개최됐어요. 덕분일까요, 어느덧 윤현상재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20만 명이 넘는 팔로워가 모여듭니다.

윤현상재 보물창고 'Episode 7:을地:공존' Doc.02 사물의 스펙트럼 현장. 사진 윤현상재

윤현상재 보물창고 'Episode 7:을地:공존' Doc.02 사물의 스펙트럼 현장. 사진 윤현상재

보물창고도 점차 규모를 더해 현대백화점과 협업 마켓을 진행하기도 하고, 코로나19로 중단되기 전 2019년 마지막 보물창고는 서울도시건축 비엔날레와 함께 을지로에서 펼쳐졌습니다. 9월과 10월 두 차례 총 3일간 진행됐던 ‘보물창고-을지공존’은 합산 10만여명의 방문객이 몰릴 정도로 성황이었죠.

느리지만 확실하게, 자기답게

스페이스 비이를 이끄는 최주연 윤현상재 부사장은 “윤현은 광고를 하지 않는 대신 스페이스 비이라는 자체 스토리텔링 통로를 만들었다”며 “우회하는 방식이지만, 디자이너·예술 애호가 등 핵심 타깃층과 ‘관계’를 쌓아가면서 업계 내에 존재감이 생겼고, 이것이 대중적 인지도 혹은 팬덤으로까지 이어졌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상업적 접근보다는 스페이스 비이를 실험적 디자인 놀이터로 삼아 기획 자체의 힘으로 모객하는 데 집중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노력은 결실을 보고 있는 듯합니다. 인테리어 업계에 종사하지 않더라도, ‘윤현상재’라는 브랜드를 적지 않게 인지하게 됐으니까요. 이들은 나중에라도 집을 고칠 일이 있을 때, 자재를 고른다면 다른 곳보다 윤현을 먼저 찾게 되겠죠.

첫 번째 유통기한 프로젝트 '로컬리티'에서 열렸던 '노산도방'의 브랜드 팝업 현장. 사진 윤현상재

첫 번째 유통기한 프로젝트 '로컬리티'에서 열렸던 '노산도방'의 브랜드 팝업 현장. 사진 윤현상재

에둘러 가는 것 같아도 결국 ‘지향하는 삶의 방식(라이프 스타일)’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윤현상재의 전략은 영리했습니다. 윤현이 펼치는 재료와 사람, 공간을 엮는 이야기들은 인테리어 자재 유통 회사로서만이 아니라 사업 영역 확장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움직임이기도 하고요.

윤현상재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자기다움을 쌓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회사 홈페이지에 적혀있는 대로 “브랜드는 막 자라나지 않으며, 살아있는 유기체 같아서 온 정성을 다해 천천히 키워가야” 하기 때문이죠. 누구나 브랜드가 되어야 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브랜드를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갈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윤현상재의 사례는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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