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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받은 은밀한 대화 남겨뒀다…'어공' 뒤흔든 '늘공'의 증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17년 10월 31일 국회에서 열린 산업통상자원부 종합감사에서 백운규 당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탈원전 정책과 관련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백 전 장관은 현재 원전조기폐쇄 압력 의혹 등으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있다. 연합뉴스

2017년 10월 31일 국회에서 열린 산업통상자원부 종합감사에서 백운규 당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탈원전 정책과 관련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백 전 장관은 현재 원전조기폐쇄 압력 의혹 등으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있다. 연합뉴스

지난 15일 ‘문재인 정부 통계조작 의혹’ 중간감사 결과를 발표한 감사원은 보도자료에서 청와대와 국토부, 한국부동산원 관계자들이 지난 정부 당시 주고받은 카톡과 대화 메시지 다수를 날짜까지 특정해 공개했다. “뭐라도 분석해야 한다. 자료 다 들고 와라”거나 “협조 안 하면 예산과 조직을 날려버리겠다”“한 주만 더 마이너스로 해달라. 이대로면 저희 다 죽는다” 등 감사원이 확보한 은밀한 대화들은 문재인 정부의 통계조작 정황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쓰였다. 감사원은 언론 브리핑에서도 “로그 기록과 카톡 등 구체적 증거로 확인한 통계조작 횟수만 94회”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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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원에 따르면 이같은 증거 자료의 대부분은 실무진들이 동의서와 함께 제출한 휴대폰에서 확보됐다. 실무진들은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며 조사 과정에서 윗선을 가리켰다. 별다른 증거 인멸 정황도 발견되지 않았다. 청와대와 국토부 압박에 시달렸던 일부 부동산원 직원은 감사원에 “의혹을 밝혀줘 고맙다”는 말까지 전했다고 한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감사원은 그렇게 한 단계씩 밟아가며 의혹의 정점으로 불리는 장하성·김상조 등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홍장표 전 경제수석,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까지 조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들은 실무진과 달리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조작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휴대폰도 내지 않았다. 조사 과정에서 직업 공무원 출신인 ‘늘공(늘 공무원)’과 정치인 및 학자 출신인 ‘어공(어쩌다 공무원)’의 입장이 갈렸다는 게 감사원의 설명이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에서 정책실장을 지낸 김상조 전 실장(왼쪽부터), 김수현 전 실장과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의 모습. 이들은 모두 통계조작 혐의로 감사원에 의해 검찰에 수사 의뢰됐다. 연합뉴스

문재인 정부 청와대에서 정책실장을 지낸 김상조 전 실장(왼쪽부터), 김수현 전 실장과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의 모습. 이들은 모두 통계조작 혐의로 감사원에 의해 검찰에 수사 의뢰됐다. 연합뉴스

감사원과 관가 내부에선 이런 차이에 대해 “월성원전 사태의 영향”이란 말도 나온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듬해 산업통상자원부는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등 탈원전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2019년 10월부터 1년 가까이 감사원 감사를 받았다. 당시 공공기관 감사국장으로 원전 감사를 지휘했던 게 유병호 현 감사원 사무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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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과정에선 백운규 전 장관이 월성 1호기 폐쇄 직전인 2018년 4월, 한시적 가동 필요성을 주장한 산자부 공무원에게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냐, 너 죽을래”라고 말한 사실도 공개됐다. 이후 백 전 장관과 김수현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원전 조기폐쇄 압력 의혹으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당시 세종 관가에서 주목했던 건 이런 윗선이 아닌 원전 업무를 담당했던 산자부 국장과 과장, 서기관의 구속이었다. 이들은 감사원 조사 직전 원전 관련 자료 수백 개를 삭제한 혐의로 2020년 12월 구속됐고, 올해 1월 1심에서 모두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까지 유죄가 확정되면 공직이 박탈되고 연금도 절반으로 깎이게 된다.

통계조작 의혹 감사를 지휘했던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이 지난 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뉴스1

통계조작 의혹 감사를 지휘했던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이 지난 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뉴스1

감사원이 이번 조사 과정에서 확보한 국토부 실무진의 대화 중엔 통계조작 의혹과 관련해 “국토부판 원전 사태가 될 수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 당시 산자부 공무원들이 구속되는 것을 보며, 국토부 내 분위기도 술렁였다는 것이다.

감사원은 문재인 정부 당시 청와대 행정관과 국토부 및 부동산원 실무진들이 통계조작 의혹과 관련해 여러 증거를 보존해둔 것도, 결국 자신들 역시 부당한 지시를 받은 피해자란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 보고 있다. 세종시의 한 과장급 공무원은 “문재인 정부 원전 사태를 보며 공직 사회가 느낀 것이 두 가지 있다”며 “하나는 어차피 다 드러난다는 것이며, 둘째는 부당한 지시를 따르면 피해는 결국 늘공이 본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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