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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쩍 갈라지며 하얀 수증기가..." 항암 대신 자연치료 회복 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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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8호 16면

뇌종양 투병 ‘연극 여제’ 윤석화

“역시 배우는 다르네요.” “윤석화가 다른 거겠지. 나 아직 살아있죠?”

정말 그랬다. 뇌종양 투병으로 인간 윤석화는 쇠약했어도, 배우 윤석화는 짱짱했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 북촌의 손바닥 만한 정원이 딸린 아담한 한옥 마루에 놓인 환자 침대 위에서 그는 기자를 맞았다. 티셔츠를 뒤집어 입고, 수술 후유증으로 앞니 4개가 빠진 채였다. 침대 한켠에 건강음료가 담긴 젖병까지. 마음이 짠했다. 그런데 카메라가 등판하니 다른 사람이 됐다. 꽃단장에 간병사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카메라 앞에선 당장 모노드라마를 시작할 듯 ‘연극 여제’의 아우라를 뿜어댄다.

힘들어도 사람들 만나니 기분 ‘업’

윤석화는 매일 맨발로 마당의 뜰을 거닐며 하루를 시작한다. 김상선 기자

윤석화는 매일 맨발로 마당의 뜰을 거닐며 하루를 시작한다. 김상선 기자

윤석화는 지난해 8월 연극 ‘햄릿’ 공연을 마친 후 영국 출장지에서 쓰러졌다. 주먹만한 머리에 지름 6㎝나 되는 종양이 들어 있었다. 20시간 대수술을 받고 사경을 헤맸다. 한때는 ‘상황이 몹시 안 좋다’는 분위기였지만, 최근 부쩍 건강해진 모습으로 외출을 시작했다. 지난달 30일 손숙의 60주년 기념 연극 ‘토카타’에도 우정 출연했다. 1년여 삶과 죽음의 롤러코스터를 탄 끝에 다시 밟은 무대가 죽음을 앞둔 여인의 삶에 대한 찬가라니.

“그저 감사했어요. 이런저런 사연을 딛고 끝끝내 무대에 오른 숙이 언니도 감사하고, 손진책 연출에게도, 관객들에게도 많이많이 감사했죠. 참 잘 쓰여진 작품이더군요. 죽음에 관한 엄청난 시인데, 죽음이 보이면 삶이 얼마나 찬란한 것인지 보이는 거잖아요. 나도 하루하루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윤석화는 매일 맨발로 마당의 뜰을 거닐며 하루를 시작한다. 김상선 기자

윤석화는 매일 맨발로 마당의 뜰을 거닐며 하루를 시작한다. 김상선 기자

쓰러지던 날은 기억하세요.
“뮤지컬 ‘토요일 밤의 열기’ 재공연 때문에 런던에 갔는데, 하루종일 일정이 많아 힘들더군요. 호텔로 가면서 후배한테 집에 신라면 있으면 좀 가져오라고 전화를 걸었죠. 얼큰한 라면과 김치를 먹으면 메스꺼움이 사라질 것 같아서요. 후배가 왔길래 잠깐 드러누웠는데, 갑자기 뇌가 쩍 갈라지며 하얀 수증기가 나오는 듯한 환각이 들더니 그 다음부턴 모르겠어요. 후배가 에어 앰뷸런스를 수배해서 한국에 보냈고, 긴급수술을 받고서 정신 차렸으니까.”
그때 병을 아신 건가요.
“워낙 병원을 잘 안 가는 사람이니까요. 웬 뇌종양?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들이나 걸리는 병 아닌가? 웬만한 걸 하나 주시면 되지 뭐 이런 거룩한 암을 주시나 너무 기막혀서 웃음이 나왔죠.”
병원 탈출을 시도하셨다고.
“입원 치료가 괴로웠어요. 방사선 치료로 쇠약해져서 혈관도 안 잡히는데, 새벽마다 들어와서 주사바늘을 찔러대니까요. 육체적으로도 아프지만 정신적으로도 고문이었어요. 새벽마다 괴성을 지르며 하루를 시작했죠. 어디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스스로 놀랄 정도로. 퇴원을 원했지만 남편과 병원이 완고하니 지인들에게 007작전처럼 날 좀 빼달라고 부탁했는데, 협조가 안되더군요. 정식으로 의사에게 요청을 했죠. 몇 년 더 사는 건 관심 없다. 1주일이라도 남은 시간에 사람들에게 충분히 고맙다 사랑한다 이야기하고 떠나고 싶다고요. 저를 담당한 신경외과 권위자 강석구 박사가 ‘아가씨와 건달들’을 8번이나 본 제 팬이었는데, 그래선지 제 말에 귀 기울여 주셨어요. 환자의 병만 보지 않고 환자의 삶도 봐주는 훌륭한 의사더군요.”
자택 서재에서. 윤석화 데뷔 33주년에 이진용 작가가 그녀의 사진들로 제작한 33점의 포토 프레임이 걸려 있다. 김상선 기자

자택 서재에서. 윤석화 데뷔 33주년에 이진용 작가가 그녀의 사진들로 제작한 33점의 포토 프레임이 걸려 있다. 김상선 기자

퇴원 후에도 항암치료 부작용에 시달렸지만, 항암약을 끊고 자연치료에 의존하면서 조금씩 기력을 회복했다. 산화질소 성분이 포함된 건강기능식품과 쑥뜸, 기치료도 꾸준히 받고 있다. 최근엔 매일 맨발로 마당의 뜰을 밟으며 감사기도로 하루를 열고 있다고 한다. 그를 5개월쯤 돌봤다는 간병사는 “처음 뵈었을 땐 걷지도 못하셨는데, 한발한발 의지로 회복하고 계시다. 많은 손님들이 거의 매일 찾아와서 그 사랑으로 회복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표적치료를 할 때는 죽고 싶었어요. 못 먹고 못 자니 무기력증과 우울증에 시달렸죠. 항암은 될지 몰라도 더 무서운 병에 걸리겠다는 생각에 약을 끊고, 힘들어도 사람들 만나면서 기분을 ‘업’시키기로 했죠. 난 암만 빼면 건강한데, 나머지 건강한 쪽을 생각해야지 왜 암만 생각하나. 그런 태도로 조금씩 입맛을 회복하니 체력도 붙더군요. 한 달에 한 번씩 검사를 받는데, 좋아지는 걸 보면 역시 잘 먹고 잘 자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이미 암이 찾아왔으니, 싸우지 말고 좋은 친구로 지내야겠다 싶어요.”

자연치료가 병을 낫게 하나요.
“치유효과가 분명 있어요. 요즘 ‘어씽(earthing)’이란 게 유행이라는데 땅을 맨발로 밟는 거예요. 누가 영상을 보내줬길래 아침저녁으로 요 작은 뜰을 걸으며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어요. 아침에 땅을 디디면서 오늘도 나에게 주신 이 호흡과 새 빛을 감사하며 시작하는 하루는 새벽마다 괴성 지르며 시작하는 하루와 비교할 수 없죠. 알몸으로 나가는데, 우리 집 마당이니 누가 보지도 않지만 볼테면 보라죠.(웃음) 암이란 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독한 애니까 불안하기도 해요. 이겨내는 방법은 다른 것까지 상하게 하진 말자, 죽기 전까지 미리 죽진 말자는 내 좌우명을 실천하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아요.”

유인촌 장관 후보와도 작품 약속

지난달 손숙(왼쪽)의 ‘토카타’ 우정출연 후 커튼콜에서. [연합뉴스]

지난달 손숙(왼쪽)의 ‘토카타’ 우정출연 후 커튼콜에서. [연합뉴스]

1975년 데뷔해 83년 ‘신의 아그네스’ 돌풍을 일으키며 연극 전성기를 이끈 윤석화는 90년대 ‘아가씨와 건달들’ ‘명성황후’ 등 초창기 뮤지컬을 성공시키며 공연계를 평정했다. 2000년 세계적 연출 거장 로버트 윌슨과 작업했고, 2011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제작자로 변신하는 등 늘 우리 공연계를 맨 앞에서 견인했다. “체온 38.5도로 살았다”고 할 정도로 열정에 들떠 살아온 무대인생인데, 멀어져 있으니 더 간절해지는 모양이었다. 투병 탓에 취소된 무대에 대한 상상을 펼치며 자꾸만 눈시울을 붉혔다. “얼마나 답답한지 어떨 땐 누워서도 작품 구상이 머릿속에 쫙 나와요. 노래도 불러보죠. 아~리랑 아~리랑…. 이렇게 미친년처럼.(웃음)”

왜 아리랑인가요.
“작년에 카자흐스탄 국립예술대학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11월 13일 고려극장 공연 예정이었거든요. 아리랑은 가장 깊은 슬픔의 노래면서 희망과 소망의 노래기도 해요. 사실 연극 ‘나는 너다’ 때부터 고려인에게 마음이 갔어요. 안중근의 족적을 찾아 연해주 벌판을 헤매며 고려인의 카자흐스탄 이주 역사를 알게 되고, 그들이 탔던 기차에서 엄청 울기도 했죠. 고향도 없이 떠돌던 그들이 고려극장을 끝끝내 지키고 오늘도 거기서 다정하게 살고 있어요. 그런 역사가 없었더라면 내가 명예박사나 받을 수 있었겠어요. 내 인생도 그렇습니다. 화려하게 보일지 몰라도 여러분이 연해주에서 끝도 없이 달려온 것 같은 여정이 나에게도 있었고, 그렇게 연극 하나 붙잡고 살았더니 여러분이 만들어 놓은 이 대지가 주는 상을 받게 됐다는 얘기를 공연으로 하고 싶었어요.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까 하는 마음으로요.”
복귀작이 될 수 있을까요.
“이미 물 건너간 약속이지만, 고려극장이 자꾸 나를 부르네요. 내년 봄쯤 무대에서 만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실 인촌 형(유인촌)이랑 뭐 한 작품 하려다가, 장관에 지명되시는 바람에 꿈을 스스로 접었죠.(웃음) 형이 참 고마운 게, 문병을 왔길래 같이 하면 딱 좋을 작품이 생각나서 같이 하자고 했거든요. 나중에 문자가 왔어요. ‘너 좋아진 모습 보니 너무 기분 좋다. 다른 작품 안 하고 기다릴 테니 빨리 몸 회복하라’고. 너무 고마워서 ‘형이 응원해 주니 금방 회복할 것 같다’고 답을 보냈는데, 장관 내려오실 때까지 나는 못 기다리겠네요.(웃음)”
버킷리스트가 생겼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상상력과 호기심 잃지 않으면서 나답게 살고 싶을 뿐이에요. 연극은 너무너무 어렵고 지겹지만, 치열하게 공부하고 무대에 올라 관객과 제대로 만났을 때의 전율 때문에 해요. 오늘 하루 별로 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내 공연을 보고 에너지와 새로운 소망을 얻었다면 아름답고 가치롭지 않나요. 연극인 복지재단 시절 윤석화 장학금을 받은 한 친구가 그제야 딸이 연극배우인 엄마를 자랑스러워 하게 됐다더군요. 누가 알아주든 몰라주든, 그런 게 나다운 삶이라 생각해요.”

암에 걸렸어도 윤석화의 뇌는 여전히 꿈꾸고 있었다. 남이 뭐라든 자기 삶의 찬가를 부른다는 그가 멋져 보였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용기를 달라고 하니 노래 두 곡으로 대신한다. ‘사의 찬미’와 ‘위너 테익스 잇 올(The Winner Takes It All)’이다. “암에 걸렸다면 암보다 더 큰 긍정의 부분을 바라보기 바래요. 힘든 일이 생기면 거기 갇히기 쉽지만, 조금만 시선을 바꿔주면 갇힐 이유가 없어요. 갇혀 봐야 이로울 것 하나 없잖아요. 그럴 땐 이런 노래도 괜찮아요.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어차피 한세상인데, 오늘 하루 충만하게 기쁨을 쌓아나가는 훈련을 하는 거죠. 내가 나를 넘어가면 이기는 것이고, 그럼 이런 노래도 부를 수 있죠. ‘위너 테익스 잇 올 루저 스탠딩 스몰~’. 결국 승리한 거니까요.” 원조 뮤지컬 여신다운 스웨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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