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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역사 2㎞ 돌담, 아름다운 그 섬에 가고 싶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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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8호 18면

‘섬연구소’ 강제윤 소장 사진전

갤러리 류가헌에서 열리고 있는 강제윤 소장의 사진전. 소금을 삼킨 듯 짠하면서도,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활기찬 풍경이 펼쳐진다. 김상선 기자

갤러리 류가헌에서 열리고 있는 강제윤 소장의 사진전. 소금을 삼킨 듯 짠하면서도,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활기찬 풍경이 펼쳐진다. 김상선 기자

“제주와 완도 사이에 위치한 여서도는 내가 ‘한국의 이스터섬’이라고 부르는 곳인데, 한국의 섬 중 돌담문화가 가장 완벽하게 보존돼 있는 곳이에요. 300년 역사의 돌담이 2㎞ 길이로 성곽처럼 둘러 있는 풍경은 세계적으로도 희귀하죠. 큰 바다를 마주한 섬이라 바람이 정말 거세서 이렇게 높게 돌담을 쌓지 않으면 밭작물 키우기는커녕 기본적인 생활도 할 수 없었으니까…. 섬마을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현장인 거죠.”

‘백섬백길’ 사진전에서 만난 ‘섬연구소’ 강제윤 소장의 말이다. 그가 보여준 휴대폰 속 작은 사진만으로도 돌담 풍경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망망대해 속 작은 섬에 이런 풍경이 숨겨져 있다니! 강 소장에게도 이 돌담은 특별하다. 완도에서 하루 한 번뿐인 여객선으로 세 시간을 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여서도에 이런 놀라운 풍경이 숨어 있다고 세상에 알린 이도, 도로공사로 인해 돌담 일부가 파괴될 것을 막아낸 이도 강 소장이다.

제주·완도 사이 ‘한국의 이스터섬’ 여서도

강제윤 소장이 20여 년째 섬을 돌아다니며 섬의 역사와 문화, 섬 음식을 기록한 책 『날마다 섬 밥상』. [사진 어른의시간]

강제윤 소장이 20여 년째 섬을 돌아다니며 섬의 역사와 문화, 섬 음식을 기록한 책 『날마다 섬 밥상』. [사진 어른의시간]

“오래 전부터 여서도 돌담의 가치에 주목했는데 섬의 몇몇 주민이 폐교를 펜션으로 만들면서 돌담 일부 구간을 허물고 도로를 낼 계획이라는 걸 알고 돌담 지키기 운동을 시작했죠. 당시 전남지사로 재직했던 이낙연 전 국무총리에게 도움을 요청해 주민들을 설득할 시간을 얻었어요. 마을총회에서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돌담을 지키기로 결의가 됐고, 그 결과 여서도의 이 아름답고 진귀한 풍경은 보존될 수 있었죠. 제 이야기를 들은 임순례 감독이 영화 ‘남쪽으로 튀어라’를 촬영하기도 했죠.”

서울 청운동에 위치한 갤러리 류가헌에서 9월 19일부터 10월 8일까지 열리는 ‘백섬백길’ 사진전은 지난 20여 년간 강 소장이 직접 섬들을 답사하고 기록해 온 아카이빙을 만날 수 있는 자리다. ‘울릉도 삼선암 바위’처럼 회화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는가 하면, ‘신안 선도’에선 겨울에도 얼지 않는 모래땅에서 대파를 키우는 아주머니들의 활기찬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이번 사진전은 최근 오픈한 ‘백섬백길’ 사이트를 소개하는 자리기도 해요. 제주 올레길이 인기를 얻은 후 지자체들이 앞 다퉈 섬마다 길을 만들었는데 극히 일부만 인기를 얻었을 뿐, 대다수는 무관심 속에 방치돼 있어요. 버려진 섬길을 되살려서 섬 관광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백섬백길’ 사이트를 구축했죠. 걷기 좋고 경치가 수려한 섬길 100개를 선정해 섬의 역사와 문화유산은 물론 섬의 특징적인 풍경과 교통편 등 다양한 정보를 모아놓은 곳이에요. 섬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도시사람들에게는 미지로의 여행을 선물하는 게 섬연구소와 저의 바람이죠.”

시인이자 사진가인 강 소장은 지난 20년 간 대한민국의 섬을 유랑해 온 나그네이자 ‘섬 활동가’다.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으로 옥살이까지 하면서 청년시절을 격렬하게 보낸 그가 고향인 보길도로 다시 돌아온 건 1998년.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보낼 생각으로 고향을 찾았지만 그에게 쉴 팔자는 없나 보다. 보길도 한가운데를 지나는 사행하천(뱀처럼 구불구불 흐르는 형태의 하천)을 변경시켜 개발이익을 얻으려는 자들이 나타났다. 오래된 숲과 하천의 자연·문화유산을 파괴하려는 개발업자들과 이를 비호하는 정치세력과 맞서 싸우기 위해 그는 33일간 단식투쟁을 벌인 끝에 하천을 지켜냈다. 섬의 가치를 발견하고 기록해야겠다고 맘 먹은 건 이 일이 있은 후다. 그는 전국의 유인도 답사를 시작했다.

여서도 돌담 지키기 운동, 영화에 모티프

“한국은 섬의 나라에요. 3면의 바다에 4000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있죠. 우리 해상영토는 육상영토보다 4.5배나 커요. 하지만 1980년에 987개였던 유인도가 지금은 463개밖에 남지 않았어요. 국가가, 사회가 지켜주지 않으니 섬사람들은 점점 더 고립되고 결국 섬을 떠날 수밖에요.”

좀 더 본격적으로 섬의 고유한 가치와 섬 주민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2012년 ‘섬 학교’를 개교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지원자들과 함께 섬 여행을 떠났다(지난해까지 100회의 섬 여행이 진행됐다). 2015년에는 사단법인 ‘섬연구소’도 설립했다. 정부의 도움 없이 뜻을 같이하는 이들의 노력으로만 일군 결과다.

관광개발을 이유로 지심도 주민들을 강제이주 시키려던 거제시장과 맞서 싸워 지심도 주민들의 영구거주 권리를 보장한 국민권익위원회 권고안을 이끌어냈다. 주민들이 기부채납한 관매도 폐교를 진도군수가 대명콘도에 팔아버리려던 시도를 저지해 주민 자산으로 지켜냈다. 잘못된 간척으로 썩어가는 천연기념물 ‘백령도 사곶 해변 지키기 운동’을 통해 문화재청의 역학 조사를 이끌어냈고, 여객선이 없거나 끊길 위기에 처한 여수 추도와 통영 수우도 등에 여객선이 다닐 수 있게 도움을 줬다. 정부에 제안해 국가 섬 기관인 ‘한국섬진흥원’도 출범시켰다.

강 소장이 섬과 관련해 지은 저서는 『섬택리지』 『신안』 『섬을 걷다 1,2』 『통영은 맛있다』 외 다수인데, 지난 21일에는 『날마다 섬 밥상』을 출간했다. 지나가는 나그네에게도 “밥 먹고 가라”고 밥상을 차려주던 섬사람들의 인심과 함께 24개의 섬 밥상과 25개의 섬 음식을 소개한 책이다. “사실 육지는 이제 어디를 가나 서울 맛이죠. 그런데 섬은 아직도 고립돼 있어서 옛날 맛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요. 진짜 듣도 보도 못한 최고의 음식들이 남아 있죠. 우리가 잃어버린 음식의 원형이 남아 있는 곳이 섬이에요.”

해녀 밥상에서 공동체 밥상까지, 메밀냉면에서 낙지호롱까지, 밥상과 음식에 담긴 사람과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촘촘하게 곁들인 사진마다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가 감칠맛을 더한다. 바다 먹거리의 보고인 섬에서 나는 음식이, 섬사람들이 차린 밥상이 얼마나 의미 있는 문화 유산인지, 지구의 미래 먹거리로서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 보여주는 귀한 기록이다.

“도시인들이 섬을 많이 찾으면 일단 교통이 편리해지죠. 거문도처럼 큰 섬도 1년에 100일씩 여객선이 끊겨요. 섬 사람들에게는 막막한 일이죠. 내륙 사람들이 섬에 가서 좋은 풍경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특산품도 사면서 소통하면 섬 사람들의 형편이 좀 나아지겠죠. 무엇보다 섬의 소중함을 알게 되면 아름다운 섬들을 오래된 미래로 지켜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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