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치유의숲’ 노래에 귀가 즐겁고 ‘레인보우’ 그림에 눈 호강하네: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GIAF23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858호 19면

연휴 때 볼만한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강릉 동부시장에 걸린 이우성 작가의 걸개 회화 연작 '흘러가듯이, 강릉'   [사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강릉 동부시장에 걸린 이우성 작가의 걸개 회화 연작 '흘러가듯이, 강릉' [사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흑표범 작가가 국립대관령치유의숲에서 벌이는 퍼포먼스. '비커밍 버즈: 뱀, 물, 새의 연습'  [사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흑표범 작가가 국립대관령치유의숲에서 벌이는 퍼포먼스. '비커밍 버즈: 뱀, 물, 새의 연습' [사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금강송의 훤칠하게 뻗은 붉은 줄기와 녹색 잎에 눈이 즐겁고 짙은 솔향에 코가 즐겁다. 나무 사이 바람소리와 물소리에 귀가 트이고 녹음과 햇빛에 번갈아 목욕하며 몸이 맑아진다. 이렇게 오감이 열리는 강릉 ‘국립대관령치유의숲’에서 나무 데크로 된 길 ‘치유데크로드’를 걷고 있으면 갑자기 눈을 맞춰오는 여성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눈을 맞춘 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놀랍고 어색하지만 자연과 어우러져 묘한 감동이 느껴지는 순간, “마법” 같은 순간이다.

이것은 세계적인 ‘행위의 작가’로 불리는 독일의 티노 세갈이 기획한 퍼포먼스 작품 ‘This You’이며, 노래를 부르는 이들은 작품의 ‘해석자(interpreter)’로서 참여한 사람들이다. 이 퍼포먼스는 26일 시작하는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GIAF)의 일환으로 페스티벌이 계속되는 10월 29일까지 누구나 대관령치유의숲 치유데크로드를 방문하는 사람이면 경험할 수 있다.

신사임당·허난설헌 낳은 예향 도시

“2008년 구 서울역사(지금의 문화역서울284)에서 있었던 전시에 티노 세갈의 해석자로 참여해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관람객이 놀라고 멈추어 섰다가 순간적이나마 해석자와 상호교류하던 것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대관령치유의숲을 보는 순간 티노 세갈이 생각났고 여기서 그의 작품을 선보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올해로 2회를 맞는 GIAF 박소희 감독의 이야기다. 박 감독은 2020·21년 울산 태화강국제설치미술제와 지난해 제1회 GIAF도 기획했다.

동부시장 전경 [사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동부시장 전경 [사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고등어 작가의 작품 ‘flakes’의 작업 스케치. [사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고등어 작가의 작품 ‘flakes’의 작업 스케치. [사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페스티벌은 강릉 곳곳에서 펼쳐진다. 강릉의 가장 오래된 시장 중 하나인 동부시장에서는 과거 대형 해물탕집이었던 ‘레인보우’에서 이우성 작가가 작품을 선보인다. 민중미술의 걸개그림에서 영향을 받은 족자 형태 화폭에 거대 정치 담론 대신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을 사실적이고 서정적 화풍으로 담은 그림들이 공간과 잘 어울린다. 또한, 주로 흑백의 드로잉으로 개인과 집단의 기억을 표현하는 고등어(본명: 김다정) 작가, 특정 지역 건축물에 스며 있는 독특한 지리적·역사적 배경을 연구하고 재구성하는 양자주 작가, 서울에서 태어났음에도 강릉에서 주로 거주하며 영상 작품을 만드는 임호경 작가가 이곳에서 작품을 선보인다.

근처에는 과거 양곡 창고로 쓰였던 옥천 웨어하우스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박선민 작가가 신작 ‘귀와 눈: 노암’을 선보인다. 과거 기차 터널로서 어두운 역사가 담겨 있지만 지금은 사진발을 너무 잘 받는 산책로로서 ‘인스타그램 핫플’이기도 한 강릉 노암터널이 사람들의 일상과 어떻게 밀착되어 있는지를 관찰한 미디어아트 작품이다. 노암터널은 1900년대 초 일본의 수탈을 위해 건설됐고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고 알려진 곳이다. 올해는 노암터널에 직접 작품이 설치되지는 않는다. 지난해에는 디지털 픽셀 추상미술의 개척자 홍승혜 작가가 잔잔한 음악에 맞추어 빛의 도형들이 터널 벽면에 떠 다니는 미디어아트 작품을 내놔 화제가 됐다.

강릉 옥천동 웨어하우스 외관 전경 [사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강릉 옥천동 웨어하우스 외관 전경 [사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옥천동 웨어하우스에서 전시 중인 박선민 작가의 미디어아트 '귀와 눈 : 노암' [사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옥천동 웨어하우스에서 전시 중인 박선민 작가의 미디어아트 '귀와 눈 : 노암' [사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에서는 세계적인 작가 프란시스 알리스가 영상 작품 ‘모래 위 선’을 국내 최초로 선보인다. 또한 강릉시립미술관에는 송신규, 임호경, 로사 바바, 아라야 라스잠리안숙, 카밀라 알베르티, 홍순명 작가가 작품을 전시한다. 이중 미술관 1층 벽면을 가득 채운 홍순명 작가의 회화 연작 ‘서유록-홍씨 여행기’가 특히 눈에 띈다. 자연 풍경과 유적지를 겹쳐 여러 장소와 시간을 묘사하고 있는데, 서울과 강원도의 풍경이 모두 있다. 110년 전 강릉 여인의 서울 여행기인 『서유록』에서 영감을 받은 그림이기 때문이다. ‘서유록’은 올해 제2회 GIAF의 주제이기도 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향토문화전자대전에 따르면, 『서유록』을 쓴 김씨 부인(1862~1941)은 강릉에서 태어나 최씨에게 시집가서 7남매를 낳고 살던 중 “남녀를 물론하고 그 나라에 태어나 자라서 늙도록 서울 구경 한번 못 하고 보면 부끄러운 일이다”라며 51세 되던 1913년에 남편과 딸과 함께 나귀를 몰고 대관령을 넘어 37일간의 여정으로 서울을 다녀온다.

여행 중에 보고 느낀 것을 구체적으로 기술한 것이 『서유록』인데 일본군이 의병을 도왔다는 이유로 민간인을 살해한 곳에 이르러서는 분노와 민족의식을 드러내고, 서울 종로의 전차와 전기 등 신문명에 대해서는 상세히 기록하며 경이로움을 표현한다. 또한 “서양 강국 영국 얘기 잠깐 들어 보니 여자가 왕 노릇 한 일 많고 지금은 그 나라 여자가 나라 정사 다스리는 권리에 참여하겠다고 남자 사회와 다툰다니” 하며 한국의 여성 교육 및 여권 신장의 필요성을 피력하기도 한다.

강릉시립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홍순명 작가의 '서유록-홍씨 이야기-2305' [사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강릉시립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홍순명 작가의 '서유록-홍씨 이야기-2305' [사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강릉시립미술관 전경  [사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강릉시립미술관 전경 [사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자연·작품 하나된 순간 묘한 감동

박 감독은 당대의 한계를 극복하고 그토록 진보적이었던 강릉 여성 문인의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그를 “페스티벌의 안내자이자 주제를 전달하는 상징적 인물”로 삼았다고 설명한다. 사실 강릉은 호수와 해변 같은 아름다운 자연 풍광으로 유명하지만, 예로부터 신사임당·이율곡·허난설헌·허교산(허균) 등을 낳은 유명한 문향이기도 하다. 또한 예향으로서 강릉단오제 등을 포함한 풍부한 놀이 문화를 보유하고 있다.

어떻게 수도와 멀고 태백산맥으로 단절되기까지 한 바닷가 도시에서 이토록 문예가 발달하고 특히 여성 문인들이 여럿 나왔을까? 박 감독은 설명했다. “한양의 문인들이 인생 필수 여행지였던 금강산으로 향할 때, 기후가 온화한 강릉에 머물며 여행 준비를 하곤 했대요. 그러다 아예 몇 년씩 눌러 살며 글을 쓰고 후학을 키우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편 산맥을 넘나드는 게 쉽지는 않으니 강릉은 수도에 종속되지 않고 자치적인 성향이 컸다고 합니다. 자생문화가 꽃피면서도 폐쇄적이지 않고 외래문화에 열린 곳이었던 거죠.”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에서 상영 중인 프란시스 알리스 작가의 '모래 위 선' [사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에서 상영 중인 프란시스 알리스 작가의 '모래 위 선' [사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GIAF는 이러한 강릉의 지역적 특징을 살리되 또한 국제적인 면모를 갖추고자 하는 노력이 곳곳에 스민 예술제다. 지역 예술제는 지역색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퀄리티가 충분하지 않은 지역 작가들의 동네 잔치가 되는 실패 사례가 적지 않았다. GIAF는 지금까지는 그러한 우를 잘 비껴가는 모습이다. 주최·주관하는 곳이 바이오제약사 ㈜파마리서치의 문화재단으로서, 지방자치단체가 아닌 강릉 기반의 기업체라는 점도 특이하다.

페스티벌은 작품 전시에 그치지 않고 지역 커뮤니티와 연계한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그 중에는 한국 내 소수자 정체성에 주목해 온 흑표범(본명 장맑은) 작가가 대안학교 및 이주민 학생들과 함께 대관령치유의숲을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의 감각으로 느껴보는 퍼포먼스 프로그램도 있다.

걷는 것을 좋아한다면 토요일마다 진행되는 ‘예술바우길’ 프로그램을 통해 축제를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GIAF와 강릉의 트레킹 코스를 개발하는 사단법인 ‘강릉바우길’이 함께 마련한 프로그램이다. 강릉역에서 출발해서 강릉시립미술관까지 이어지는 바우길 14구간 초희길을 거쳐, 동부시장과 옥천동 웨어하우스를 거쳐가는 코스로 진행된다.

다음에는 월화거리와 강릉의 명물 월화정을 지나는데, 월화정은 신라시대에 잉어가 러브레터를 물고 가서 연인들의 재회를 도와주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그리고 노암터널을 거친 후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에 도달하는 코스다. 총 6.2㎞에 달하는 코스를 25~30명이 함께 걷는 것으로, 토요일 아침 10시 반에 강릉역 2번 출구에서 선착순으로 현장 접수하면 된다. 자세한 것은 GIAF의 홈페이지(http://giartfestival.com)와 인스타그램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