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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학살한 日간토 대지진…1905년 경고 무시, 피해 커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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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9월 1일 간토 대지진 당시 일본 도쿄에서 화재가 발생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지난 1일 10만 여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일본 간토 대지진의 100주년을 맞았다. AP=연합뉴스

1923년 9월 1일 간토 대지진 당시 일본 도쿄에서 화재가 발생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지난 1일 10만 여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일본 간토 대지진의 100주년을 맞았다. AP=연합뉴스

100년 전인 1923년 9월 1일 발생한 일본 간토(關東) 대지진.
규모 7.9의 이 강진으로 당시 도쿄 일원에서 10만 명이 넘는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이 중 90%는 화재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지진 피해는 조선인 학살로도 이어졌는데, 당시 극심한 화재 피해가 강한 바람 탓이란 연구 결과가 제시됐다.
특히, 1905년에 지진과 화재 피해 경고가 있었는데도 이를 무시하는 바람에 피해를 키웠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 지진학회 회보에서는 간토 대지진 100주년 맞아 특집호를 발간했다.
지난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간토 대지진을 비교한 논문, 간토 대지진 화재 피해를 자세히 다룬 논문 등이 포함됐다.

2011년 지진 때보다 심하게 흔들려

간토 대지진 당시 지진 세기. 지진 세기(진도)를 10등급으로 나눠 표시하는 일본 기상청 방식으로 표시한 것이다. [자료: Bulletin of the Seismological Society of America]

간토 대지진 당시 지진 세기. 지진 세기(진도)를 10등급으로 나눠 표시하는 일본 기상청 방식으로 표시한 것이다. [자료: Bulletin of the Seismological Society of America]

간토 대지진은 1만5000여 명이 사망하고 2000여 명이 실종된 2011년 동일본 대지진보다 훨씬 큰 피해를 냈다.

도쿄대학과 교토대학 연구팀은 간토 대지진 당시의 지진을 시뮬레이션했는데, 지진 규모 자체는 동일본 대지진이 9.0으로 훨씬 컸지만, 도쿄지역만 놓고 보면 간토 대지진 때 도쿄가 훨씬 심하게 흔들렸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가미 만(灣)에 위치한 진원이 도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특히, 세 지점을 골라 비교했을 때 간토 대지진이 10개 등급으로 구분하는 일본 기상청의 지진 강도 규모 기준으로는 0.8~1 더 컸고, 지진 응답 스펙트럼으로는 최대 5배까지 더 컸다.

응답 스펙트럼은 지진이 발생했을 때 구조물이 어느 정도로 반응하는지를 나타내는 수치로, 구조물에 대한 지진의 잠재적 영향을 평가하는 데 필수적인 정보다.

도쿄 지역의 경우 과거 바다와 습지를 매립한 지역을 중심으로 액상화 현상까지 나타나면서 2011년보다 1923년 지진 피해가 더 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액상화는 물을 머금고 있는 모래 같은 토양 속 입자가 지진 충격 때문에 갑자기 액체처럼 흐물흐물해지고, 이에 따라 지반이 가라앉으면서 건물이 기울거나 넘어가는 현상이다.

지진과 강풍, 물 부족이 화재 키웠다

간토 대지진 화재 당시 불에 탄 소방차. 현재의 소방차에 비해 펌프 능력도 작고 호스도 짧다. [자료: Bulletin of the Seismological Society of America]

간토 대지진 화재 당시 불에 탄 소방차. 현재의 소방차에 비해 펌프 능력도 작고 호스도 짧다. [자료: Bulletin of the Seismological Society of America]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과 교토 대학 연구팀 등은 지진 후 화재 확산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연구팀은 "간토 지진이 발생한 시간이 오전 11시 58분으로 점심 준비를 위해 숯불·화로 등의 불을 한참 사용하던 시간이었고, 이 불이 목조 건물이 가득 찬 도쿄 시내 곳곳에서 화재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최초 1시간 동안 도쿄 시내에서는 약 100건의 화재가 발생했다. 도쿄 소방국의 펌프 자동차가 31대에 불과했다.

지진 발생 당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초속 약 10m 안팎 강한 바람이 계속 불었고, 가연성 목조 주택이 밀집한 탓에 화재의 72%는 초기 단계에서 꺼지지 않고 인접 건물로 확산했다.

간토 대지진 당시 도쿄 시내로 번진 화재. [자료: Bulletin of the Seismological Society of America]

간토 대지진 당시 도쿄 시내로 번진 화재. [자료: Bulletin of the Seismological Society of America]

여기에 진동과 액상화로 상수도관이 파열돼 수돗물 공급이 끊기면서 불을 끌 물도 부족해졌다.

불이 번지자 사람들은 공원 등 탁 트인 공간으로 대비했지만, 공원 면적이 도시 면적의 2.2%에 불과할 정도로 부족했다.
면적 0.66㎢인 도쿄 우에노 공원만 약 50만 명이 대피했다. 야스쿠니 신사 경내에도 5만 명이나 대피했다.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 우에노역 앞 광장에서 지진 후 발생한 화재를 피해 피난민들이 소지품을 들고 모여들고 있다. AP=연합뉴스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 우에노역 앞 광장에서 지진 후 발생한 화재를 피해 피난민들이 소지품을 들고 모여들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대피한 곳까지 불이 번지는 바람에 한 곳에서 약 4만 명이 한꺼번에 희생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22만 채(주거용 18만4000채 포함)의 건물이 화재로 소실했고, 도쿄시 면적의 약 43%에 해당하는 지역이 화재를 당했다.

재산 피해는 총 15억 엔으로 추산됐는데, 1923년 당시 일본 국내 총생산(GDP) 약 45억 엔의 3분의 1이나 됐다.

1905년 경고 무시해 피해 키웠다

간토 대지진 화재 당시를 묘사한 그림. [자료: Bulletin of the Seismological Society of America]

간토 대지진 화재 당시를 묘사한 그림. [자료: Bulletin of the Seismological Society of America]

이 같은 간토 대지진의 피해에 대한 경고는 이미 1905년에 제기됐다고 논문은 전했다.

도쿄 제국대학 교수이자 지진학자인 이마무라 아키쓰네(今村明恒, 1870~1948)는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과거 큰 지진이 도쿄를 덮치면 어떻게 될까"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1905년 당시까지 큰 지진이 없었으므로 50년 이내 가까운 장래에 큰 지진이 도쿄를 덮칠 것이고, 도쿄 인구 밀도가 과거보다 높아지고 화재에 취약해져 10만 명이 죽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마무라는 등유를 사용해서 불을 밝히는 것을 금지하고, 새로 짓는 건물 사이에 간격을 넓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지진학자 이마무라 아키하네. [위키피디아]

일본 지진학자 이마무라 아키하네. [위키피디아]

그러나 동료 학자들은 곧바로 비난을 퍼부었다.

특히, 도쿄 제국대학의 동료인 오모리 후사키치는 "폭풍우가 불거나 바람이 부는 날씨에는 지진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이론을 바탕으로 지진 후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할 것이라는 이마무라의 주장을 강하게 반박했다.

논란이 벌어지면서 이마무라는 최고의 지진학자라는 명성을 잃었다.

그러는 사이 인구가 1900년 112만 명에서 1922년 240만 명으로 증가하면서 화재에 더 취약해졌다.
결국 이마무라의 예언은 1923년 간토 대지진에서 안타깝게도 적중하고 말았다.

질서 무너지면서 학살로 이어져

일본 도쿄도 스미다구 아라카와 인근에 있는 간토대지진 한국·조선인 순난자 추도비. 연합뉴스

일본 도쿄도 스미다구 아라카와 인근에 있는 간토대지진 한국·조선인 순난자 추도비. 연합뉴스

한편 엄청난 지진과 화재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하자 인심도 흉흉해졌다.

도쿄 시민들은 집도 타버렸고, 수도관이 파괴돼 마실 물도 부족했다.
쌀을 보관하던 창고가 타버리면서 식량도 부족해졌다.

연구팀은 논문에서 "1923년 간토 대지진과 화재로 전례 없는 물리적 파괴와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측면이 사라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질서가 붕괴하였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질서 붕괴는 곧 도덕적·문화적 규범의 붕괴로 이어지기도 했다.

논문에서는 조선인 학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 대신 "소수자와 타인에 대한 소문을 바탕으로 한 폭력이 터져 수천 명이 사망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당시 상황을 요약했다.

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불을 지른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등 유언비어 때문에 조선인이 학살됐는데, 당시 독립신문은 조선인 학살 희생자가 6천661명이라고 보도했다.

간토 학살 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가 6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주최한 입장발표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간토 학살의 역사와 추도 배경을 밝히고 한국 정부에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연합뉴스

간토 학살 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가 6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주최한 입장발표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간토 학살의 역사와 추도 배경을 밝히고 한국 정부에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연합뉴스

일본의 논픽션 작가인 와타나베 노부유키는 최근 국내에도 번역된 '관동대지진, 학살 부정의 진상'(삼인)이란 책에서 "간토 대지진 당시 지역 내 자경단들은 유언비어를 유포했고, 신문들이 이런 유언비어를 인용하고 정부의 요구에 맞춰 '가짜뉴스'를 보도함으로써 조선인을 학살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지적했다.

조선인들이 저질렀다는 테러도 아무런 실체가 없었다는 게 와타나베의 지적이다.

간토대지진 100주년 추념식 사진.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 제공]

간토대지진 100주년 추념식 사진.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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