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만명 희생 르완다 학살 고통…후손 DNA에 새겨져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2.01.15 12:00

업데이트 2022.01.15 13:09

르완다 대학살 희생자들의 유골. 르완디 키갈리 대학살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AFP=연합뉴스

르완다 대학살 희생자들의 유골. 르완디 키갈리 대학살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AFP=연합뉴스

1994년 아프리카 르완다에서는 대학살이 벌어졌다. 내전의 와중이던 그해 4~7월 후투족 민병대가 소수 민족인 투치족과 일부 온건한 후투족 등 110만 명을 학살했고, 25만~50만 명의 여성이 강간했다.

28년 전에 벌어진 이 참극으로 인해 르완다 성인 생존자의 28%, 여성 생존자의 48%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았다. PTSD는 전쟁·고문·재해·사고 등을 경험한 사람이 그 공포를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을 말한다.

르완다에서는 학살 참사를 경험한 사람은 물론 직접 경험하지 않은 다음 세대 중에서도 PTSD를 앓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참상에 노출된 어머니와 자녀는 노출되지 않은 어머니와 자녀보다 스트레스 해소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가 낮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외상 노출이 자녀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르완다. 중앙일보

르완다. 중앙일보

최근 르완다 학살의 참상을 겪은 사람의 유전자(DNA)에 변형이 생기고, 이러한 변형이 후손에게 전달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대학살 고통이 DNA에 새겨져 후손에게 유전된다는 것이다.

임신 2~3기 때 학살 참상 목격

르완다 제노사이드 피해자 메리아나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르완다 제노사이드 피해자 메리아나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르완다 제노사이드 추모관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르완다 제노사이드 추모관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미국 사우스플로리다 대학과 영국 런던 위생·열대의학 대학원, 르완다의 르완다 대학 등 국제연구팀은 최근 후성 유전체학 저널인 '에피제노믹스(Epigenomics)'에 게재한 논문에서 르완다 집단 학살 생존자와 관련된 후성(後成)유전학 연구 결과를 공개했다.

후성 유전은 생존 과정에서 겪은 경험이 DNA의 기능을 변화시키고, 이것이 후손에게 전해지는 현상이다. DNA의 염기서열이 뒤바뀌는 것이 아니라 DNA 분자에 메틸기(CH3-)가 추가되는 메틸화(Methylation) 등의 방식으로 DNA 분자가 변형되고, 유전자 발현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논문에 따르면 연구팀은 임신 중에 대량학살에 노출된 투치족 어머니 20명과 그들이 낳은 16명의 자녀를 대상으로 백혈구 DNA를 분석했다. 또, 대조군으로 학살이 일어날 당시 외국에 거주했던 투치족 어머니 13명과 그들의 자녀 10명도 함께 조사했다.

참상에 노출된 어머니들은 당시 임신 2기(14~28주차)와 3기(28주차 이후 출산 전까지)에 해당했다. 어머니들이 경험한 참상은 ▶생포·납치 위협 직면 ▶학살 목격 ▶심각한 부상 ▶무기 공격 목격 ▶살해 장면 목격 ▶사체 목격 ▶성적 학대 노출 ▶강간 및 집단 학살 현장 노출 등이었다.

연구팀은 전체 백혈구 DNA 분석을 통해 '차별적으로 메틸화된 영역(Differentially methylated region, DMR)' 24개를 확인했고, 이 가운데 참상 노출과 통계적으로 연관이 있는 DMR을 3개 찾아냈다. 바로 BCOR, PRDM8, VWDE다.

DNA 변형…획득 형질의 유전

지난 1994년 르완다 기세니에서 키갈리로 배급받아 돌아오는 난민의 행렬. 중앙포토

지난 1994년 르완다 기세니에서 키갈리로 배급받아 돌아오는 난민의 행렬. 중앙포토

33명의 어머니는 학살 경험 여부에 따라 이들 세 가지 영역에서의 메틸화 정도가 달랐다.
학살을 경험한 어머니들은 메틸화가 더 많이 일어난 것이 확인됐다. 학살 경험에 노출됐던 어머니가 낳은 자녀도 비(非)노출 어머니 자녀에 비해 더 높은 DNA 메틸화를 나타냈다.

BCOR은 초기 배아 발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암과 발달 지연, 피부 증후군 등 다양한 질병과 관련이 있다. PRDM8은 신경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임신 중 산모의 흡연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VWDE는 외상에 노출된 아버지로부터 자녀에게 메틸화 DNA가 전달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VWDE의 변이는 주요 우울장애(MDD)와 관련이 있다.

르완다 대학살 피해자 사진이 키갈리에 있는 키갈리 대량학살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AFP=연합뉴스

르완다 대학살 피해자 사진이 키갈리에 있는 키갈리 대량학살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AFP=연합뉴스

연구팀은 "이들 DMR의 높은 메틸화 수준을 고려할 때, 이러한 효과 중 일부가 후성 유전적으로 자녀에게 전달될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연구팀은 또 "어머니와 자녀 모두에서 확인된 DMR은 정신 장애와 관련이 있으며, 이는 집단 학살 노출이 세대 내에서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까지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3개의 DMR 중에서도 BCOR과 VWDE 두 가지는 개인 내에서 뇌 DNA와 혈액 DNA 메틸화 사이에 상당한 상관관계가 있었다"며 "이는 백혈구 DNA에 나타난 대량 학살 노출 신호가 뇌와 관련이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덧붙였다.

굶주린 겨울을 보낸 네덜란드 어린이들

1944년 혹독한 겨울을 지내던 당시의 네덜란드 사람들. [네덜란드 국가 기록보관소]

1944년 혹독한 겨울을 지내던 당시의 네덜란드 사람들. [네덜란드 국가 기록보관소]

한편, '획득 형질'이 유전된다는 후성 유전학의 대표적인 사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극심한 기근을 겪은 네덜란드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독일 나치 치하의 1944~1945년 겨울 네덜란드 서부 지역은 6개월간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다. 이 겨울 동안 식량 배급은 일일 에너지 요구량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기근 동안 잉태된 아이들은 나중에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고, 당뇨병과 비만, 심혈관 질환, 미세단백뇨 등 기타 건강 문제에 더 취약했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아이들도 평균보다 작았다.

이를 통해 어머니의 기근 경험이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일종의 후성 유전적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70년 뒤 이들에 대해 DNA를 분석한 결과, 어머니 뱃속에서 성장 유전자의 조절 시스템이 변경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러한 DNA 변형은 기근 상황을 견디는 데는 도움이 됐을 수도 있지만, 나중에는 신진대사에 좋지 않은 작용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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