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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웃게했다…"삼성이 왜?" 비난에도 30년 전 회장님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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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야, 이제 혼자서도 아기랑 안전하게 다닐 수 있어서 너무 기뻐. 외출이 두렵지 않고, 다음 산책과 여행 기대하게 해준 너에게 정말 고마워….” 
-안내견 ‘미지’와 함께하는 시각장애인 김영신씨-

19일 경기도 용인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30주년 기념식에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과 함께 한 안내견 '조이'. 이소아 기자

19일 경기도 용인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30주년 기념식에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과 함께 한 안내견 '조이'. 이소아 기자

19일 오전 경기도 용인의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강당에 모인 사람들은 ‘시각장애인 안내견’이란 글씨가 새겨진 노란 조끼를 입은 강아지들을 바라보며 함께 울고 웃었다. 이날은 ‘삼성화재 안내견학교’가 문을 연 지 30주년이 되는 날. 그동안 수많은 시각장애인의 눈과 발이 돼 준 ‘천사견’ 래브라도 리트리버 안내견들이 주인공이었다.

눈물바다 된 숲속 학교

경기도 용인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간판. 이소아 기자

경기도 용인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간판. 이소아 기자

기념식에는 본격적인 훈련을 받기 전까지 어린 강아지를 맡아 키운 봉사자들(퍼피워커), 안내견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시각장애인들(파트너), 소임을 다 하고 은퇴한 안내견을 입양한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 삼성의 안내견 ‘조이’와 국회를 누비는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 배진교 정의당 의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홍원학 삼성화재 사장 등도 참석했다.

19일 경기도 용인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에서 새롭게 활동을 시작하는 안내견들과 시각장애인 파트너, 관계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뒷줄 왼쪽부터)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윌리엄 손튼 세계안내견협회장, 홍원학 삼성화재 사장, 박태진 삼성화재안내견학교 교장. 사진 삼성

19일 경기도 용인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에서 새롭게 활동을 시작하는 안내견들과 시각장애인 파트너, 관계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뒷줄 왼쪽부터)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윌리엄 손튼 세계안내견협회장, 홍원학 삼성화재 사장, 박태진 삼성화재안내견학교 교장. 사진 삼성

안내견 분양식에서 자식처럼 키운 안내견을 시각장애인들의 곁으로 떠나보내는 봉사자들은 아쉽고 자랑스러운 마음에 눈물을 훔쳤다.
이재용 회장과 홍라희 전 관장도 처음부터 끝까지 기념식을 지키며 막 태어난 작은 강아지가 정든 봉사자들의 손을 떠나 2년에 걸친 훈련과정을 거쳐 시각장애인의 ‘가족’으로 활동하는 영상을 시종일관 미소를 띠며 지켜봤다. 두 사람이 추도식 등 가족행사가 아닌 회사 ‘공식 행사’에 함께 참석한 건 2016년 6월 호암상 기념 음악회 이후 7년 만이다. 홍 전 관장은 초창기 어려움을 딛고 손수 사업을 챙기던 남편의 생전 모습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오른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이 안내견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한 시각장애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있다. 사진 삼성

(오른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이 안내견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한 시각장애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있다. 사진 삼성

“사람도 못 먹고 사는데 개를 키운다고?”

삼성의 안내견학교는 지난 1993년 9월 고(故) 이건희 회장의 뜻으로 만들어졌다. 안내견이란 존재가 낯설고 장애인 복지에 대한 인식도 낮았을 때다. 이건희 선대회장은 “장애인 복지재단이 아무리 많이 설립된다 해도, 장애인들이 거리에 나섰을 때 일반인들의 눈이 차갑다면 그런 사회를 복지사회라고 부를 수 없다”며 안내견 사업을 시작했다. 그동안 총 280마리의 안내견이 배출됐으며, 현재 국내에서 76마리가 활동하고 있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과 래브라도 리트리버. 사진 삼성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과 래브라도 리트리버. 사진 삼성

홍 전 관장은 “회장님(이건희 선대회장)께서 살아계실 때 정말 관심이 많으셨다. 오늘 행사를 보셨으면 더 좋아하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용 회장도 김예지 의원에게 “와 주셔서 감사하다”며 “조이는 어디 있나요?”라고 밝게 묻기도 했다.

초기에는 삼성 안내견학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건희 선대회장은 에세이집 『작은 것들과의 대화』에서 “삼성이 처음으로 개를 기른다고 알려졌을 때 일부에서는 사람도 못 먹고 사는 판에 개가 다 무어야, 하는 공공연한 비난의 소리를 내기도 했다. 차라리 직접 가난한 사람들이나 복지단체에 기부를 하라는 것이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비록 지금은 현실도 모르는 이상주의자라거나, 바보라는 비난을 듣고 있지만 10년이나 20년이 지난 다음에 우리가 옳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게 될 것이다. 안내견 사업이 우리 사회의 복지 마인드를 한 수준 높이는 데 기여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10마리 중 3마리만 훈련 통과 

안내견 한 마리를 길러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진돗개는 주인 한 사람에 대한 충성심이 너무 강해 여러 명의 시각장애인을 돕는 게 어렵다. 리트리버 중에서도 골든 리트리버에 비해 조금 덜 예민한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적합한데, 성격과 건강 상태를 고려해 1년에 50마리 정도를 번식한다.

삼성화재 안내견 학교에서 안내견이 될 준비를 하는 예비 안내견들. 사진 삼성

삼성화재 안내견 학교에서 안내견이 될 준비를 하는 예비 안내견들. 사진 삼성

태어난 강아지는 두 달간 안내견학교에서 키운 뒤, 자연스러운 사회화 교육을 위해 1년간 일반 가정에 맡긴다. 이 후 종합평가를 거쳐 1차 합격한 개들이 본격적인 안내견 훈련을 받게 되는데 최종 통과율은 30~35% 밖에 되지 않는다. 4만6000명에 달하는 국내 시각장애인 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다. 안내견이 은퇴하는 나이는 7~8세로, 입양을 원하는 가정에 맡겨지고 기존 시각장애인은 좀 더 젊은 안내견이 재분양된다.

19일 경기도 용인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30주년 기념식에서 은퇴 후 입양돼 새로운 가족을 맞이한 은퇴 안내견이 쉬고 있다. 이소아 기자

19일 경기도 용인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30주년 기념식에서 은퇴 후 입양돼 새로운 가족을 맞이한 은퇴 안내견이 쉬고 있다. 이소아 기자

“한송이 국화 피우는 것처럼”…안내견 선진국 되다 

지난 30년 간 안내견을 돌본 자원봉사 가정만 2000여 곳이고, 훈련사들은 매년 250일을 지구에서 달까지 왕복(76만㎞)한 것보다 훨씬 긴 81만㎞를 안내견과 함께 걸으며 훈련했다.

이건희 선대회장은 이를 두고 “한 마리 안내견이 성장하기까지 수천만, 수억원의 돈으로도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애정의 크기로 퍼피워킹을 해 주는 자원 봉사자들의 숨은 노력이 있다. 그 노력을 먹고 자라는 한 송이 국화, 그게 안내견이다”라고 했다.

19일 경기도 용인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에서 훈련사와 시범을 보이고 있는 안내견. 이소아 기자

19일 경기도 용인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에서 훈련사와 시범을 보이고 있는 안내견. 이소아 기자

그 결과 세계안내견협회(IGDF)는 1999년 삼성화재 안내견학교를 정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처음엔 제대로 된 안내견 훈련 매뉴얼도 없었지만, 이제는 일본·대만 등지에서 더 나은 훈련법을 배우려고 이곳을 방문한다.

법과 제도도 빠르게 선진화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장애인 보조견 조항을 신설했고, 환경부는 국립공원에 안내견 출입을 허용했다. 안내견과 기차나 비행기로 여행하면 안내견 좌석이 무상으로 제공된다. 2020년부터는 국회 본회의장에도 안내견이 출입할 수 있다.

무엇보다 대중교통 시설이나 공공장소에서 안내견과 함께 다니는 시각장애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뜻해지고 자연스러워졌다. 이건희 선대회장이 “인식과 관습을 바꾸는 문화적 업그레이드야말로 사회 복지의 핵심이고, 그것이 기업이 사회에 되돌려줄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재투자”라고 한 안내견 육성 취지가 결실을 본 셈이다.

박태진 안내견학교 교장은 “고 이건희 회장님의 혜안과 신념, 그리고 모든 이들의 사랑과 헌신으로 삼성 안내견 사업을 이어올 수 있었다”며 “아름다운 동행을 위해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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