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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손학규 특별기고

다당제 기초 놓는 선거법으로 민주주의 회복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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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후퇴하는 선거법 개정 방향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세계가 어지럽고 나라가 어수선하다. 캠프 데이비드 회담으로 한미일 안보체제가 확립되고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으로 북·러 협조체제가 강화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새로운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미·중 대결은 날로 심화하여 세계가 바야흐로 새로운 냉전체제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여야 권역별 병립형 비례대표제 합의는 정치개혁 역행
양당제 구조 허무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정치 바꿔야
독일, 연동형 비례제 통해 협치·연정 유도…정치 안정화
여러 정당 국회서 정책 연대하는 연합정치 제도화해야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성장했고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도 한국의 지위를 선진국으로 격상했지만 경제가 부진하고 장기적으로도 암울한 전망 속에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주도하는 공급망 재편은 중국보다도 한국이 더 큰 대상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반도체 등 첨단기술산업이 풍전등화다.

매일 정장 차림으로 단식한 이유는

손학규 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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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새로운 대전환기에 처해있고 한국이 이러한 위기에 봉착해 있는데도 대한민국의 정치는 대응 능력을 모색하기는커녕 오직 정권 쟁취를 위한 내분에만 휩싸여 길을 헤매고 있다. 이런 마당에 여야가 추진 중인 선거법 개정은 권역별, 병립형 비례대표제로 합의가 되어가고 있다는 관측이다.

한마디로 후퇴다. 나는 2018년 12월에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쟁취하기 위해 무기한 단식을 했다.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매일 면도하고 넥타이 매고 정장을 하면서 깨끗한 모습으로 정자세를 유지했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나서서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연동형 비례대표에 대한 지지를 약속받고 여야 거대 정당이 합의해서 열흘 만에 단식을 풀었다.

단식이 끝나고 정당 간 선거법 협상 과정에서 연동률을 정당별 전국득표의 50%만 반영한다는 준 연동형으로 축소되고, 비례대표 47석 중 30석에만 ‘연동형 캡(cap·상한선)’을 적용하는 등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완전히 ‘걸레’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연동형’이라는 제도가 채택되었으니 시행해 나가면서 앞으로 더욱 발전시킨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선거가 다가오자 양대 정당에서 위성비례정당을 만들어 민주당은 180석을 차지하는 등, 거대 양당의 배타적 극대화는 더욱 심해졌다.

나의 단식 목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였지만 본뜻은 대한민국 정치개혁이었다. 날로 격화하는 한국 정치의 극한 대결은 대통령제와 양당제에 기인하고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양극화된 정당 세력 간의 극한투쟁은 점점 심화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 결과를 뒤집기 위해 지지자들에게 의회에 난입하여 난동을 부리도록 선동한 혐의를 받고 있다.

대통령제와 양당제의 구조적 폐해가 드러난 것이다. 이제 선거제 개혁을 통해서 그 한 축을 무너뜨리자는 것이다. 대통령제를 당장 폐지할 수 없으니 우선 양당제라도 일부 긁어내서 다당제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연립내각을 구성하여 합의제 민주주의의 기초를 한구석에서라도 시작해보자는 취지였다.

내각제 다시 보게 된 독일 연수 경험

나는 원래 내각제 반대론자였다. 당연히 대통령제가 옳은 제도였다. 우리나라는 남북분단으로 강력한 카리스마가 필요하고, 경제성장을 위해서도 효율적인 정치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내각제는 정당 간 싸움으로 정치적 혼란만 야기하고, 재벌의 로비에 정치가 놀아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나의 생각은 2013년에 10여 개월간 독일에 가서 연수 생활을 하면서 바뀌었다. 독일은 우리나라와 여러 가지로 사정이 비슷했다. 인구도 8000만으로 남북한 합계와 비슷하고, 기술 제조업으로 수출해서 먹고 사는 경제이고, 2차대전 후 동서로 분단되었던 나라다. 그런 나라가 어떻게 통일이 되었고, EU 통합을 주도하고, 그리스 등 경제 위기에 처한 나라들을 주도적으로 도와주는 세계의 강자가 되었는지 궁금했다.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보니 이러한 독일 성공과 번영의 바탕에는 정치 안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총리민주주의, 다당제, 연립정부 등이 키워드였다. 소연정, 대연정을 거치면서 정치적 안정을 유지했고, 정책의 연속성을 가질 수 있었다. 자유민주당 대표 겐셔는 기민당, 사민당과의 연정을 통해서 18년간 외무장관직을 지낸, 좌우 통합과 정책적 연속성의 증인이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키징어 총리와의 연정에서 시작해 1982년 콜 총리에까지 계승되어, 드디어 독일 통일까지 이루게 되었다. 탈원전 정책은 원래 1970년대 창립된 녹색당의 정치 구호 같은 정책으로 시작해서 사민당과의 연정을 통해서 법적 구속력을 갖게 되었고, 후쿠시마 사태를 계기로 메르켈이 국가 정책으로 선언하게 된 것이다.

독일의 경우 1949년 헌법 제정 시 가장 신경을 쓴 것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불안과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의 재등장 방지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지역과 비례가 각각 반반씩 차지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바꾸면서 다당제 연합정부의 제도적 기초를 마련했다.

군소정당 난립 우려 ‘5% 룰’로 방지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역구 의원과 지지정당에 대한 투표를 각각 하여 정당별 지지율로 전체 의석을 배분하고 여기서 지역구 당선자 수를 뺀 의석을 비례대표에 배분하는, 비례성을 강화하는 방식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로는 어느 정당도 과반수를 확보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협치의 정치, 연정을 할 수밖에 없다. 1949년 서독의 정부수립과 이를 이은 통일 독일 정부 이래 단 한 차례도 단독정부는 없었다. 1957년에는 기민당이 단독 과반수로 총선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데나워는 독일 정치의 안정을 위해 자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독일은 비례대표의 과다로 생길 수 있는 정치적 불안요소인 군소정당의 난립을 5% 진입장벽으로 막았다. 또 하나의 정치적 안정 요소는 건설적 불신임제다. 총리를 불신임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의석 과반수로 총리 후보를 선임해야 한다. 1949년 서독 정부 수립 이래 슈미트 총리만 불신임당하였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대한 우려가 큰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제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통령제는 양당 간에 정권 교체를 통해 이루어지고 다당제는 이 취지에 어긋나는 체제라는 논리다.

물론 오랫동안 대통령제와 양당제에 익숙하게 살아온 국민으로서는 다당제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다. 미국에서도 자유당과 녹색당이 있으나 극히 미미한 세력으로 무시해도 좋을 존재다. 무소속의 로스 페로가 1992년 무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해 19%를 얻었으나 이내 사라지고,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도 무소속이었으나 대통령 후보 경선은 민주당으로 참여해서 중도 사퇴했다. 이렇게 미국의 양당제도는 난공불락의 아성이다.

영국에서도 자유민주당(Liberal Democrats)이 2010년 선거에서 57석을 얻어 보수당-자유민주당 연립정부를 구성해 당수가 부총리에 취임했으나, 그 뒤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영국은 내각제이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 없이 단순다수제 소선거구제이기 때문이다.

헌정사의 수치였던 위성비례정당

내년 총선에서 사태 추이에 따라서는 여러 정당의 출현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한다. 이제 우리는 다당제의 기초를 마련해 놓아야 한다. 다양한 정치 세력을 억지로 두 거대정당의 틀 안에 묶어둘 것이 아니라, 여러 정당이 국회에 입성해서 정책 연대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는 연합정치를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바로 이러한 정치개혁의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 우선 준 연동형의 50% 제한 및 30석의 캡을 없애고, 비례대표 의석을 늘려야 한다. 지난 총선에 보였던 위성비례정당은 반드시 금지되어야 한다. 대한민국 헌정사의 커다란 수치다. 지역구 출마자 하나 없이 비례대표 명단만을 제시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지역구 253석 중 3분의 1 또는 최소 5분의 1이라도 출마시키는 정당에만 비례대표 명단을 제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고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고, 광적 지지자들의 팬덤에 의한 ‘직접민주주의’가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 과학기술과 통신수단의 발달로 정치는 의회가 아니라 방송과 SNS에 의해 진행된다. 포퓰리즘은 이를 향한 정치인들의 생래적 몸짓이다. 여기서 정치 리더들의 새로운 권위주의가 움튼다. 정당은 보스의 눈짓 하나로 움직이고, 국회는 독립성을 잃는다.

이재명 대표의 뜬금없는 단식과 윤석열 대통령의 때아닌 이념논쟁을 보며 이제 정말 싸움의 정치는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양당제와 무소불위의 대통령제는 개혁되어야 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진정한 대의제 민주주의로 가는 첫걸음이다.

다 지나간 이야기 같고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용기와 끈기를 갖고 꾸준히 추구하면 언젠가는 온다는 것을 믿는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