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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北도발 땐 9·19합의 중단하라"…그뒤 北 합의 위반 멈췄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9ㆍ19 남북군사합의’가 5년만에 본격적인 존폐 기로에 섰다는 관측이 나온다. 9ㆍ19합의는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나온 평양공동선언의 부속 합의서로, 남북 간에 일체의 적대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김성한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에 참석, 북한 무인기 대응방안 등 관련 보고를 받고 있다. 윤 대통령은 북한의 무인기 도발 직후인 지난 1월 9.19군사합의의 효력을 정지하는 방안을 검토해달라고 지시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김성한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에 참석, 북한 무인기 대응방안 등 관련 보고를 받고 있다. 윤 대통령은 북한의 무인기 도발 직후인 지난 1월 9.19군사합의의 효력을 정지하는 방안을 검토해달라고 지시했다. 연합뉴스

정부 핵심인사는 18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북한의 무인정찰기 투입 이후인 지난 1월 윤석열 대통령이 ‘9ㆍ19선언의 효력정지를 검토하라’고 지시한 뒤 관련 법적 검토를 이미 마쳤다”며 “한국이 명시적으로 효력정지를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법적으로 국회의 동의 없이도 효력정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취지의 결론을 이미 도출한 상태”라고 말했다.

이 인사는 다만 “절차적 정당성과는 별개로 효력를 정지하는 결정은 정치적으로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야 할 사안이기 때문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다”고 덧붙였다.

북한군의 장사장포 훈련 모습. 북한은 2019년 11월 9·19 군사 합의 위반에 해당되는 NLL 인근 창린도에서 해안포 사격을 했으나 문재인 정부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연합뉴스

북한군의 장사장포 훈련 모습. 북한은 2019년 11월 9·19 군사 합의 위반에 해당되는 NLL 인근 창린도에서 해안포 사격을 했으나 문재인 정부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연합뉴스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 제23조 2항에는 ‘대통령이 남북합의서 효력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정지시킬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효력 정지의 조건은 ‘남북관계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거나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다.

효력정지 결정과 관련해선 ‘국회의 체결ㆍ비준 동의를 얻은 남북합의서의 효력을 정지시킬 때는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3항)는 규정이 있지만, 9ㆍ19합의는 국회 비준 없이 이뤄졌기 때문에 효력정지 시에도 국회동의 절차가 필요하지 않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라고 한다.

정부가 9ㆍ19합의에 대한 효력 정지를 검토한 배경은 북한이 이미 이를 노골적으로 위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2 국방백서’에 따르면 북한은 2019년 2월 ‘하노이 노 딜’ 이후 같은해 11월 해상완충구역으로 해안포를 발사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해 12월 무인기를 투입해 서울 상공을 휘젓고 다니기까지 모두 17차례에 걸쳐 합의를 무시해왔다.

'2022 국방백서'에 따르면 북한은 2019년 11월 이후 9ㆍ19군사합의를 모두 17차례에 걸쳐 위반해왔다. 북한은 그러다 지난 1월 윤석열 대통령이 ″군사합의의 효력정지를 검토하라″는 지시가 나오자 군사합의 위반에 해당하는 도발을 중단했다.

'2022 국방백서'에 따르면 북한은 2019년 11월 이후 9ㆍ19군사합의를 모두 17차례에 걸쳐 위반해왔다. 북한은 그러다 지난 1월 윤석열 대통령이 ″군사합의의 효력정지를 검토하라″는 지시가 나오자 군사합의 위반에 해당하는 도발을 중단했다.

주목할 점은 지속적으로 9ㆍ19합의를 위반해온 북한이 합의 위반 행위를 중단한 시점이다.

북한의 마지막 합의 위반은 지난해 12월 26일 서울 상공에 띄웠던 무인기 도발이었다. 무인기 도발 직후인 올해 1월 4일 윤석열 대통령은 “북한이 다시 우리 영토를 침범하는 도발을 일으키면 9ㆍ19 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검토하라”고 지시했고, 이후 직접적으로 합의를 깨는 북한의 도발은 중단됐다.

북한이 '전승절'(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일) 70주년인 지난달 27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병식을 개최했다고 28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보도했다. 신문은 "새로 개발·생산돼 우리 공군에 장비하게 되는 전략무인정찰기와 다목적 공격형 무인기가 열병광장 상공을 선회하면서 시위 비행했다"고 전했다. 뉴스1

북한이 '전승절'(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일) 70주년인 지난달 27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병식을 개최했다고 28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보도했다. 신문은 "새로 개발·생산돼 우리 공군에 장비하게 되는 전략무인정찰기와 다목적 공격형 무인기가 열병광장 상공을 선회하면서 시위 비행했다"고 전했다. 뉴스1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정부가 합의 효력정지에 대한 검토에 돌입한 뒤 북한이 도발을 중단한 것은 문재인 정부 때 체결된 9ㆍ19합의가 군사적으로 북한에 유리하게 설계돼 있다는 것을 북한 역시 알고 있다는 의미”라며 “다만 정부는 한국이 먼저 효력 정지 선언을 할 경우 향후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상황 등을 고려해 사실상 합의가 유명무실해진 상태에서도 명시적 효력정지 선언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윤석열 정부의 ‘2기 안보 내각’으로 평가받는 김영호 신임 통일장관에 이어 신원식 국방장관 후보자는 지명 직후 공통적으로 9ㆍ19 합의 파기 가능성을 시사했다.

김 장관은 청문회 준비를 위해 처음 출근한 지난 6월 30일 기자들과 만나 “북한이 합의를 충실히 지키지 못하고 고강도 도발을 하면 정부도 나름대로 입장을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 후보자 역시 첫 출근길이었던 지난 15일 “9ㆍ19 군사합의는 군사적 취약성을 확대하므로 반드시 폐기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왔다”고 말했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 후보자가 15일 서울 용산구 육군회관에 마련된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신 후보자는 첫 출근길에서 9.19 군사합의의 폐지 가능성을 언급했다. 뉴스1

신원식 국방부 장관 후보자가 15일 서울 용산구 육군회관에 마련된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신 후보자는 첫 출근길에서 9.19 군사합의의 폐지 가능성을 언급했다. 뉴스1

다만 신 후보자는 군사합의의 폐기를 언급하면서도 “국방부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다”며 정부 내 의견 수렴이 필요하단 의견을 냈다.

군 관계자는 “작전통인 신 후보자는 군사 작전상 9ㆍ19합의가 북한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측면이 있어 폐기돼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 장관 취임 후 보완책을 논의하게 될 것”이라며 “북ㆍ러간 기술 이전이 사실로 드러나거나 10월로 예고된 군사위성 발사 등 결정적인 계기가 생길 경우 법에 규정된 대로 효력정지 결정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전했다.

2018년 9월 19일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평양공동선언문에 서명한 뒤, 합의서를 들어 보이고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2018년 9월 19일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평양공동선언문에 서명한 뒤, 합의서를 들어 보이고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만약 정부가 군사합의를 변경하기로 결정한다면 방식은 합의 파기가 아닌 효력 정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남북관계 발전법’엔 효력정지의 조건이 명시돼 있지만 ‘폐기’ 또는 ‘파기’와 관련한 조항은 없다. 법을 잘 알고 있는 윤 대통령이 군사합의와 관련한 지시를 하면서 파기가 아닌 효력정지를 검토하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법적으로 효력정지가 이뤄질 경우 효력을 정지시킨 조건이 해소될 경우 효력은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다. 전임 정부 때 맺은 남북 정상간 합의 자체를 원천무효화하는 파기와 달리 명확한 법적 근거가 있고, 정치적 부담도 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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