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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단식 출구' 찾다가…야당 '국회 출구' 닫았다 [View]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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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야당 대표의 단식 투쟁 출구찾기가 한국 정치를 또 극단으로 내몰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16일 비상의원총회에서 당 소속 의원 전원의 이름으로 한덕수 국무총리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제출하고 내각 총사퇴를 요구키로 결의하면서다. 체포동의안의 국회 이송을 앞두고 지난달 31일 시작된 이재명 대표 단식 투쟁에 대통령실이나 여당이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단식 중단의 명분 마련이 여의치 않자 야당이 막다른 골목에서 꺼내든 카드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쇄신을 압박하겠다는 취지지만 '헌법에 따라 국민이 입법부에 부여한 행정부 견제 권한이 거대 야당 대표의 단식 출구전략 도구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단식 투쟁 16일차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종교 및 시민사회단체 원로들을 만나고 있다. 강정현 기자

단식 투쟁 16일차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종교 및 시민사회단체 원로들을 만나고 있다. 강정현 기자

민주당은 의총에서 대통령실의 순직 해병 수사 방해 의혹 등 진상규명 특검법과 검사 탄핵도 동시에 추진키로 했다. 박광온 원내대표는 의총 직후 기자들과 만나 “민주당 의원 전원은 윤석열 정권의 폭정과 검찰 독재에 맞서는 총력 투쟁을 선언한다”고 밝혔다. '강(强)대 강(强)' 극한 대결의 출사표나 다름없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단식 17일차인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박광온 원내대표가 비상의원총회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뉴시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단식 17일차인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박광온 원내대표가 비상의원총회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뉴시스

헌법상 국회는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 발의로 국무총리·국무위원 해임건의안을 제출할 수 있다. 해임건의안은 발의 직후 처음 열리는 국회 본회의에서 보고되고, 이로부터 24시간 이후 72시간 이내에 무기명투표에 부쳐져 재적의원 과반수(150명) 찬성으로 가결된다. 앞서 지난해 9월 박진 외교부 장관과 지난해 12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해임건의안 가결 때 처럼 민주당 단독 의결이 가능하다. 국무총리에 대한 해임건의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은 헌정 사상 전례가 없다. 민주당은 이번주 초에 해임건의안을 발의하겠다는 계획이다. 18·20일에는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위한 본회의가, 21·25일에는 법안 처리를 위한 본회의가 예정돼 있다. 주초에 해임건의안이 발의되면 20일 본회의에 보고된 뒤 21일 본회의에서 표결에 부쳐질 가능성이 크다.

검찰은 이르면 18일 이 대표에 대해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과 백현동 개발특혜 의혹을 병합해 두 번째 구속영장을 청구한다는 계획이다. 이 경우 국무총리 해임건의안과 제1야당 대표 체포동의안이 같은 날 국회 본회의 표결에 부쳐지는 초유의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  민주당 원내지도부 관계자는 “두 안건이 함께 본회의에 오르면 ‘체포동의안을 막으려고 해임건의안을 올렸다’는 오해를 살 수 있어 시점은 고민 중”이라고 전했다.

민주당이 해임건의안과 내각총사퇴 요구 등 강경투쟁에 돌입한 배경에는 이른바 ‘개딸(개혁의딸)’로 불리는 강성 당원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이들은 최근 온건파 원내지도부를 향해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의원직 총사퇴를 결단하라”고 압박해 왔다. 당 청원게시판인 국민응답센터에 올라온 “박광온 원내대표 사퇴 촉구” 청원은 닷새만인 17일 현재 4만명 가까운 동의를 얻었다. 16일 비공개 의총에서도 강경파 의원은 “원내지도부 투쟁력이 약하다”는 비판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같은 야당의 폭주엔 정부·여당의 책임도 없지 않다. 이 대표 단식이 8일째를 맞았던 지난 7일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이 대표에게 단식 중단을 권유할 생각이 있는가’라는 취재진 질문에 "지금 단식하고 계신가? 잘 모르겠다"고 답하면서 민주당을 자극했다. 이후 김 대표가 지난 14일과 16일 잇달아 페이스북을 통해 단식 중단을 요청했으나, 정부와 여당의 무대응에 대한 여론의 비난이 이미 빗발친 뒤였다. 대통령실은 시종일관 무반응이었다. 17일에도 대통령실은 한 총리 해임건의안 발의 건에 대해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다. 해임건의 대상인 한 총리가 이날 총리실 간부들에게 “오로지 우리 국민 잘살게 하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고 일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이 전언으로 알려졌을 뿐이다.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가 16일 지역구인 울산 남구에서 '김만배-신학림 대장동 허위 인터뷰 의혹' 규탄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김기현 대표 페이스북 캡처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가 16일 지역구인 울산 남구에서 '김만배-신학림 대장동 허위 인터뷰 의혹' 규탄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김기현 대표 페이스북 캡처

여야간 대화 창구가 열리기는커녕 양당의 대립은 더 첨예해졌다. “구속을 피해 보겠다고 당 대표는 단식을 시작했고, 겁박당한 의원들은 큰절을 올리며 눈도장 찍기에 바쁘다. 구속을 피하겠다고 정부와 검찰에 총력투쟁을 선포하다니 정말 ‘그로테스크(기괴)’하다”(장동혁 국민의힘 원내대변인), “무도한 윤석열 정권의 폭주를 바로잡기 위해 야당 대표가 18일째 단식을 이어오고 있지만 국민의힘은 조롱하기 바쁘고, 대통령은 무시로 일관하고 있다.국민을 적으로 돌리는 정권은 국민 손에 의해 심판받게 될 것”(박성준 민주당 대변인)이란 '닥치고 공격'만 오갔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제1야당이자 원내 다수당 대표가 단식해야만 자기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면 그게 무슨 의회 민주주의인가. 또 정부·여당도 (야당과) 대화할 생각이 없다”며 “그러다 보니 자꾸 말이 날카로워지고 적대감만 강해진다”고 지적했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어느 순간부터 한국 정치에서 정당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 양 진영 싸움의 돌파구가 없다”며 “총선 전까지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단식 18일째를 맞은 이날 오후 민주당 지도부는 119에 구급차 출동을 요청했으나, 이 대표가 병원 이송을 거부했다. 당 관계자는 “피도 순환이 안 되고 혈압도 낮아졌다. 언제든지 위급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날 오전에는 김원기·문희상·임채정 등 민주당 원로들이 이 대표를 찾아 입원을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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