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9조 패션제국의 시작은 넥타이 한 장…랄프 로렌 "내 성공 비결은"

중앙일보

입력

랄프 로렌과 부인 리키 로렌이 지난 6월 백악관 행사에 참석한 모습. 둘은 로렌이 성공하기 한참 전 만나 60년 이상 잉꼬부부로 살아오고 있다. AP=연합뉴스

랄프 로렌과 부인 리키 로렌이 지난 6월 백악관 행사에 참석한 모습. 둘은 로렌이 성공하기 한참 전 만나 60년 이상 잉꼬부부로 살아오고 있다. AP=연합뉴스

1967년 미국 뉴욕의 한 양복점. 넥타이 판매를 담당하던 28세 청년 랄프 립시츠가 사장 면담을 청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고, 자신의 이름을 딴 넥타이를 디자인하게 해달라고 하는 그에게, 사장은 기회를 줬다. 립시츠가 들고 온 디자인은 일명 '팻 타이(fat ties)'. 좁은 폭의 넥타이가 유행하던 시절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폭이 넓은 디자인이었다. 넥타이엔 '랄프 로렌'이고 적힌 라벨이 붙어있었다. 넥타이는 폭발적 반응을 불렀고, 립시츠는 독립해 자신의 브랜드를 차렸다. 미국적 스타일을 정의해온 패션 브랜드, 랄프 로렌의 탄생이다.

랄프 로렌으로 개명한 립시츠는 올해 83세의 거장 디자이너이자 막강한 패션 왕국의 제왕이 됐다. 지난주 뉴욕 패션 위크에서도 디자인은 물론 파티의 스테이크 미디엄레어 익힘 정도까지, 현장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16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가 게재한 인터뷰에서 "모두가 '랄프 로렌'을 입고 싶어하고 '랄프 로렌'이 되고 싶어한다는 건 즐거운 일"이라며 "옷의 디자인이 재미를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빈털터리 패션 디자이너 청년이었던 그는 넥타이에서 출발, 남성복과 여성복까지 성공시키며 1990년대 억만장자가 됐다. 지난해 기준 그의 자산은 약 70억 달러(약 9조 3000억원)으로 추산된다고 WP는 전했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의 취임식에 랄프 로렌 정장을 입고 참석한 퍼스트레이디 멜라니아 여사. 로이터=연합뉴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의 취임식에 랄프 로렌 정장을 입고 참석한 퍼스트레이디 멜라니아 여사. 로이터=연합뉴스

미국의 전 퍼스트레이디 멜라니아 트럼프와 현 질 바이든까지, 취임식부터 귀빈 행사에 찾는 패션 브랜드가 랄프 로렌이다. 폴로 경기를 하는 랄 로렌 로고는 아마도 가장 많이 카피되는 이미지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런 그의 항해 역시 순풍만 겪진 않았다. 동시대에 유행하는 디자인에 반기를 들곤 했던 그는 때로 조소와 무시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턱시도에 나비넥타이가 드레스 코드였던 한 파티의 기억이 대표적이다. 그가 턱시도 재킷에 청바지와 카우보이 부츠를 매치하고 나타나자 좌중은 술렁였다고 한다. 그는 WP에 "한 패선 평론가는 대놓고 나를 조롱했다"며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비판하거나, 비웃었던 때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어 "그래도 나의 개성은 내가 스스로 빚어가는 것"이라고 확언했다.

자신감은 그러나 성공의 단일 레시피가 아니다. 성공 비결을 묻는 WP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재능.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본인의 재능은 물론이요, 적재적소에 맞는 인재를 알아보고 투자해서 데려오는 재능도 포함한다. 그의 자신감과 재능이 곧 반세기의 역사를 쓰는 브랜드의 토양인 셈이다.

셀럽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는 랄프 로렌. 지난 8일 미국 뉴욕 패션 위크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모습이다. AP=연합뉴스

셀럽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는 랄프 로렌. 지난 8일 미국 뉴욕 패션 위크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모습이다. AP=연합뉴스

반짝이는 브랜드들은 많지만 장수하는 브랜드는 적다. WP는 "로렌이 이렇게까지 오래 명성과 성공을 누리는 것은 꽤 이례적"이라며 "도나 카란부터 페리 엘리스 등 다양한 디자이너들은 한 시대를 대표하긴 했지만 이젠 사라져버린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고 전했다.

브랜드의 대표적 이미지도 확고하다. WP는 "랄프 로렌이라는 브랜드는 미국 중에서도 특히 백인 엘리트를 대표하는 프레피 룩"이라고 말했다. 정작 로렌은 이런 정의를 혐오한다고 WP는 전했다. 그는 "내가 하는 모든 게 '프레피 룩'이라고 간단히 정의된다"며 싫어했다고 한다.

질 바이든 현 퍼스트레이디가 지난 5월 영국 찰스 3세 대관식을 위해 선택한 옷 역시 랄프 로렌 정장이었다. AP=연합뉴스

질 바이든 현 퍼스트레이디가 지난 5월 영국 찰스 3세 대관식을 위해 선택한 옷 역시 랄프 로렌 정장이었다. AP=연합뉴스

이름은 왜 바꾼 걸까. 립시츠라는 성(姓)은 그의 유대인 이민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로렌'이라는 그가 택한 이름의 사뭇 귀족적인 어감과는 거리가 있다. 그의 부모는 뉴욕 브롱크스에 뿌리내린 예술가였다. 그는 WP에 "'립시츠'라는 성은 일단 발음도 어렵고, 아이들이 놀리곤 했는데 그게 싫었다"며 "지금이라면 글쎄 안 바꿀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때는 시대가 좀 달랐다"고 말했다.

WP가 또 찾아낸 로렌의 성공 비결은 '재미를 추구하는 자세'에 있다. WP는 "그의 서재엔 로봇 장난감부터 턱시도를 입은 테디베어까지 다양한 물건이 가득해 흥미로운 혼돈의 세계를 이룬다"고 전했다. 반면 그 곁엔 외교의 거장 헨리 키신저가 로렌에게 써 보낸 편지가 놓여 대조를 이룬다.

패션의 거장도 피해가지 못하는 것, 나이다. 랄프 로렌은 언제까지 랄프 로렌일 수 있을까. 그는 WP에 "어떤 옷들은 시간이 흘러도 멋이 있다"며 "내가 56년 전에 만든 디자인과, 지금 만드는 디자인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아름다움 것, 재미있는 것, 좋은 것은 영원하다"고 덧붙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