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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프레임 벗고 서양 클래식과 완벽 조화...2023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올해로 22회를 맞아 환골탈태를 예고했던 전주세계소리축제가 15일 막을 올렸다. 24일까지 열흘간 ‘상생과 회복(Coexistence and Resilience)’을 키워드로 11개국, 89개 프로그램에 총 108회 공연이 한옥마을을 비롯한 전주와 전북 14개 시군에서 펼쳐진다.

전주세계소리축제는 영국 송라인즈가 선정한 ‘국제 페스티벌 베스트 25’에 선정된 바 있는 글로벌 음악축제지만, 그간 국악과 월드뮤직 중심의 프로그램으로 운영해 국내 인지도가 높지 않았다.

2023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공연 '상생과 회복' [사진 전주세계소리축제]

2023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공연 '상생과 회복' [사진 전주세계소리축제]

그런데 올해 클래식과 국악에 조예가 깊은 것으로 유명한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이 조직위원장을 맡고 음악인류학자 김희선 국민대교수가 집행위원장을 맡아 외연을 확장한 덕에 처음으로 전국적인 관심이 쏠리고 있다.

15일 열린 개막공연에는 클래식 업계 종사자를 비롯해 주류문화계 인사들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글라인본 페스티벌 등 세계적인 음악 페스티벌의 시스템을 본뜬 ‘소리축제열차’를 타고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으로 모여들었다.

축제의 키워드이기도 한 ‘상생과 회복’이라는 타이틀로 열린 개막공연은 변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이었다. 전통음악이나 국악기에 대한 집착은 보이지 않았다. 국악관현악단이 아니라 전주시립교향악단이 연주를 도맡고, 25현 가야금 협주곡과 장구, 북, 꽹과리 정도가 등장했다.

2023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공연 '상생과 회복' [사진 전주세계소리축제]

2023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공연 '상생과 회복' [사진 전주세계소리축제]

로린 마젤 지휘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평양에서 공연했던 ‘아리랑 환상곡’으로 포문을 열고, 한국을 대표하는 성악가인 소프라노 서선영과 바리톤 김기훈이 창작 오페라 ‘박하사탕’‘춘향전’의 아리아와 ‘새야새야 파랑새야’‘뱃노래’ 등을 벨칸토 창법 그대로 불렀다. 소리꾼 고영열과 김율희의 판소리 눈대목 열창도 오케스트라 편성으로 웅장함을 더했다. 서선영과 김기훈, 고영열과 김율희가 다함께 어우러진 위촉초연곡 ‘꿈’도 그림같은 앙상블을 보여줬다.

요컨대 한국음악사 속 ‘당악의 향악화’에 착안한 ‘양악의 토착화’ 레퍼토리로 구성한 무대였다. 그간 ‘동서양의 융합’을 명분으로 국악계가 시도해 온 무대는 주로 국악기로 서양음악을 연주하거나 국악관현악에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같은 양악기가 협주하는 형식이 많았고, 어딘지 부조화스러움이 존재했었다. 그런데 이번 공연은 서양음악이라는 큰 그릇 안에 한국의 전통을 조화롭게 녹여내는 차별화된 방향성이 돋보였다.

2023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공연 '상생과 회복' [사진 전주세계소리축제]

2023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공연 '상생과 회복' [사진 전주세계소리축제]

특히 개작 초연인 김성국 작곡의 25현 가야금협주곡 ‘바람과 바다’, 위촉 초연인 최우정 작곡의 ‘꿈’은 서양 클래식에 못지않은 스케일의 대작이라 할만했다.

‘바람과 바다’는 장구, 꽹과리, 징의 3가지 타악기가 중심이 되는 동해안 별신굿 장단과 선율을 재료로 작곡된 국악관현악곡이지만, 이번에 가야금과 서양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으로 완전히 개작되어 국악관현악 특유의 추상성이 아니라 실제 거친 파도가 연상되는 장엄함으로 관객의 마음에도 반향을 일으켰다.

최우정 서울대 작곡과 교수가 남도 민요인 ‘거문도 뱃노래’를 중심으로 오펜바흐 ‘호프만이야기’중 뱃노래와 과테말라 뱃노래까지 총 6곡의 동서양 뱃노래를 엮어 만든 4중창곡 ‘꿈’도 성악가와 소리꾼이 주거니받거니 절묘한 앙상블을 이루며 힘차게 노를 젓는 기운이 넘쳐흐르는 대작이었다.

16일 아침 10시에 전라감영에서 공연된 ‘풍류뜨락’도 한옥 대청마루에 앉아 18세기 유럽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악기 하프시코드와 같은 시기 조선 선비들이 즐기던 정가 가곡 연주가 우아하게 어우러지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다.

헨델 미뉴엣 사단조, 쿠프랭 ‘신비한 장벽’ 등 대표적인 하프시코드 연주곡들이 조성한 경건함 가운데 거문고, 대금, 단소 등의 여백 넘치는 반주로 세상에서 가장 느린 노래인 정가를 듣는 시간이었다. 30초가 넘어가는 영상도 보기 힘들어하는 현대인에게 한 음절에 10초가 넘는 기나긴 호흡의 노래를 듣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치유와 정화의 힘을 발휘했다. 바로크 악기와 거문고, 단소, 대금이 일말의 어색함 없이 마치 원래부터 한 식구였다는 듯 한 무대를 구성한 것도 ‘양악의 토착화’를 치열하게 모색한 결과물이었다.

20일 아침 전라감영에서 공연된 '풍류뜨락'. [사진 전주세계소리축제]

20일 아침 전라감영에서 공연된 '풍류뜨락'. [사진 전주세계소리축제]

올해 축제는 팬데믹 이후 처음 열리는 전면 대면 축제인 만큼 김대진, 라포엠, 이자람, 블랙스트링, 악단광칠, 이희문 등 최고의 예술가들의 공연이 이어지고, 레전드 명창(김일구·김수연·정순임·신영희·조상현)들과 전주한옥마을의 역사적 명소를 결합한 국창열전 완창판소리 등 오직 전주에서만 만날 수 있는 무대로 라인업을 가득 채웠다.

이왕준 조직위원장은 “축제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지만 지역사회 행사에 머물러 온 측면이 있다”면서 “그간 미흡했거나 보충했으면 하는 각계의 의견을 최대한 모아 변화를 시도하려고 했다. 올해 축제가 한 단계 재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전주=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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