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펜하이머'에 왜 피카소 그림이? 양자역학·큐비즘 서로 통하다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857호 20면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과 현대미술   

영화 '오펜하이머'(2023) 포스터와 영화 중 나온 피카소의 그림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여인'(1937) [유니버설픽처스, 파리피카소미술관]

영화 '오펜하이머'(2023) 포스터와 영화 중 나온 피카소의 그림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여인'(1937) [유니버설픽처스, 파리피카소미술관]

“핵폭탄이 터지기 전에 내 방광이 터지겠네”라는 어느 관객의 네이버 한줄 평이 수천 개의 ‘좋아요’를 받을 정도로 ‘오펜하이머’는 3시간의 긴 러닝타임에 어려운 물리학 용어가 난무하는 영화다. 그럼에도 이번 주에 누적 관객 수 300만 명을 돌파했다. 전세계적으로는 1조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J.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라는 인물 자체와 그를 둘러싼 역사적 상황이 매우 흥미로워서도, 인물과 역사의 다면체적 면모를 잘 살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연출 덕분에도 그럴 것이다. 영상도 빛난다. 예를 들어,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인 트리니티 테스트 장면은 과학 다큐처럼 사실적이고 건조하면서도 실험 관찰자의 감각적·심리적 체험을 절묘하게 반영해서 오히려 더 드라마틱하다.

현실을 매우 다르게 새롭게 보기

영화에는 현대미술이 등장하는 장면도 있다.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가 유럽에서 공부하던 젊은 시절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큐비즘(입체주의) 그림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여인’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곧이어 오펜하이머의 양자역학에 대한 명상을 형상화한 불꽃과 푸른 소용돌이의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 그림은 최근 우리나라에 온 적이 있다. 본래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소장품인데, 2021년 서울 예술의전당 ‘피카소 탄생 140주년 기념전’에서 논란의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과 함께 전시되었다.

2021년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피카소 탄생 140주년 기념전’에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여인'(왼쪽)이 전시되어 있다. 문소영 기자

2021년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피카소 탄생 140주년 기념전’에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여인'(왼쪽)이 전시되어 있다. 문소영 기자

‘오펜하이며’ 영화에 피카소의 그림은 왜 등장한 것일까? 미국의 미술 전문지 ‘아트뉴스’는 피카소 예술과 현대 물리학의 유사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어 왔으므로 그런 맥락으로 등장한 것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피카소와 친했던 미국의 문인 거트루드 스타인의 말을 인용했다. “피카소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고유한 현실성을 가진 것들이었는데,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의 현실성이었다.”

피카소와 오펜하이머 모두 ‘현실성’을 일반인의 직관과는 매우 다르게, 새로운 방법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피카소의 경우, 전통 서양화가들이 한 찰나에 한 앵글에서 바라본 세상을 묘사한 것과 달리, 여러 순간에 걸쳐 여러 앵글에서 바라본 세상을 동시에 표현하는 큐비즘 회화를 창시했다.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여인’의 앞모습과 옆모습이 합쳐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오펜하이머는 양자역학을 통해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인 원자와 더 작은 입자들의 현상을 계산하고 인식할 수 있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펜하이머’(2023)의 포스터. [사진 유니버설픽처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펜하이머’(2023)의 포스터. [사진 유니버설픽처스]

사실 피카소의 큐비즘은 양자역학보다도 현대 물리학의 또 다른 한 축인 상대성이론과 더 잘 결부된다.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라는 고전 물리학적 믿음을 전복하고, 시간이 관측자에 따라 상대적으로 다르게 흐를 수 있으며, 시간과 공간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얽혀 있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빛의 속도로 움직이면 시간은 멈추게 되며 따라서 사물의 앞모습과 뒷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다. 평소에는 앞모습을 보다가 뒷모습을 보려면 시간을 들여 뒤로 돌아가는 공간적 이동을 해야 하는 반면에 말이다. 큐비즘 그림은 사물의 앞모습과 옆모습 등 여러 관측 지점에서 본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니 시공간의 상대성을 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현실에 실존하지만 볼 수 없고 직관적으로 이해하기도 힘든 것’을 다룬다는 점에서 오펜하이머의 양자역학과도 연결된다.

한편 피카소가 공산주의자였다는 점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오펜하이머의 젊은 시절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이 1950년대 매카시즘 시절 그의 보안 기밀 접근권 박탈 등 수난을 초래했고 그게 영화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니까 말이다. 피카소는 1944년 공산당에 가입할 당시 “이곳 프랑스에서나 내 조국 스페인에서나 (나치와 파시즘에 대항해) 가장 용감하게 싸웠던 것은 공산주의자들 아닌가요?”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당시 많은 서구 지식인이 공유한 생각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지인들처럼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으나 스페인 내전에서 우익 파시스트 프랑코와 싸우는 좌파 인민전선 정부에 후원금을 보내기도 했다.

‘인셉션’에선 에셔의 계단 그림 재현

하지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1945)이 잘 풍자했듯이 스탈린이 장악한 공산주의 러시아도 또 하나의 파시즘 국가로 변모했다. 피카소는 그 상황을 애써 외면한 반면, 오펜하이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1939년 스탈린과 히틀러의 조약(독소 불가침 조약) 이후로 공산당을 비판했으며 그랬다는 증거를 1954년 보안 접근권 청문회에서 제출하기도 했다. 따라서 시간이 흐른 후 많은 역사학자들은 오펜하이머에 대한 조치가 정치 싸움에서 비롯된 과도한 것으로 보고 있고, 영화도 그러한 견해에 따르고 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놀란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현대미술의 명작을 함축적인 의미로 등장시키거나 영화 장면으로 재현하곤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영화가 ‘인셉션’(2010)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감독한 영화 ‘인셉션’(2010)에서 불가능한 계단 장면. [사진 워너브라더스]

크리스토퍼 놀란이 감독한 영화 ‘인셉션’(2010)에서 불가능한 계단 장면. [사진 워너브라더스]

M.C. 에셔의 ‘올라가기와 내려가기’(1960). [사진 위키피디아]

M.C. 에셔의 ‘올라가기와 내려가기’(1960). [사진 위키피디아]

영화에서 주인공 코브(리어나도 디카프리오)와 그의 동료들은 타겟이 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정교하게 설계한 꿈을 꾸도록 하고 꿈 속에 들어가 타겟이 간직한 기밀 정보를 빼오는 일 ‘익스트랙션(extraction)’을 업으로 삼고 있다. 그와 반대로 타겟의 무의식에 어떤 생각을 심는 일 ‘인셉션(inception)’도 있는데, 한 기업인의 의뢰로 경쟁기업 후계자에게 인셉션을 행하게 된다.

코브의 팀은 타겟이 눈치 채지 못하는 자연스러운 인셉션을 위해 꿈 속의 꿈, 그 꿈 속의 꿈, 이런 식으로 꿈을 세 겹으로 설계한다. 또한 타겟을 압박하기 위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건축 구조를 꿈에 집어넣는데, 그 중 하나가 영화의 대사처럼 “영원히 계속되는 층계, 펜로즈 계단처럼 닫힌 고리”다. 그 대사와 함께 네덜란드의 화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1898~1972)의 유명한 그림 ‘올라가기와 내려가기’(1960)를 꼭 닮은 계단이 등장한다.

원작 그림을 보면, 한 줄의 수도사들은 계단을 올라가고 다른 한 줄은 내려가는 것 같은데, 잘 보면 그들은 사실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가지고 못하고 끝없이 원점으로 돌아오고 있다. 사실 이런 계단은 현실의 3차원 공간에서는 불가능하다. 3차원의 세계를 2차원 지면에 표현하면서 사물의 비례를 정교하게 비틀어 착시를 일으키는 에셔의 솜씨 덕분에 이 불가능한 세계가 얼핏 현실적으로 보이게 되었다.

그런데 왜 이 계단을 ‘펜로즈 계단’이라고 부를까? 이 그림은 2020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수학자 로저 펜로즈가 젊은 시절 고안해내고 에셔에게 보여준 ‘펜로즈 삼각형’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펜로즈가 이 기묘한 삼각형을 그려보게 된 이유는, 국제 수학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에 갔다가 에셔의 수학적이고 역설적인 독특한 그림들을 보고 한눈에 반한 나머지 ‘나도 뭔가 불가능한 것을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펜로즈와 에셔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관계였다. 그리고는 함께 놀란에게 영감을 준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감독한 영화 ‘다크나이트’(2008)에서 조커가 등장하는 장면. [사진 워너브라더스]

크리스토퍼 놀란이 감독한 영화 ‘다크나이트’(2008)에서 조커가 등장하는 장면. [사진 워너브라더스]

경매사 크리스티가 지난해 서울 분더샵 청담에서 열었던 ‘프랜시스 베이컨x아드리안 게니’ 특별전 가운데 전시됐던 베이컨의 ‘자화상을 위한 두 개의 습작’(1970). 문소영 기자

경매사 크리스티가 지난해 서울 분더샵 청담에서 열었던 ‘프랜시스 베이컨x아드리안 게니’ 특별전 가운데 전시됐던 베이컨의 ‘자화상을 위한 두 개의 습작’(1970). 문소영 기자

놀란은 화가의 그림을 주요 캐릭터 디자인의 밑거름으로 사용한 적도 있다. ‘다크 나이트’(2008)에서 주연 배트맨만큼이나 강렬한 캐릭터였던 인간혐오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악당 조커는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의 그림을 참고해서 탄생했다.

감독은 테이트 미술관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어릴 때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인데, 얼굴을 (뒤틀리게) 표현하는 방식이 기억의 뒤틀림을 암시하는 것 같아 좋았다. 특히 그의 그림들의 황량함에 끌린다. (…) 조커의 광대 메이크업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 지 정할 때 (원작 코믹스의 만화적인 모습보다) 더 현실적이고 위협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에게 베이컨의 화집을 갖고 가서 물감이 어떻게 어우러지고 색채가 어떻게 섞여 갖가지 뒤틀린 얼굴 모습이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했다.”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땀에 반쯤 지워진 듯한 축축한 조커 메이크업이 탄생했다.

놀란은 테이트와의 대담에서 이런 말도 했다. “영화에서 대화나 내레이션을 넘어서서 무엇인가를 표현하려면 미술의 가르침과 인도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그가 앞서의 영화들 외에도 ‘테넷’(2020) 등 여러 작품에서 미술을 등장시키곤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의 다음 영화에서는 또 어떤 미술작품을 만날 수 있을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