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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기억] 사진의 선한 영향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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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7호 31면

‘폐광, 흔적에 길을 묻다’, 강원도 태백, 2017년. ⓒ박노철

‘폐광, 흔적에 길을 묻다’, 강원도 태백, 2017년. ⓒ박노철

배추 수확이 한창이다. 경사지에 돌담을 쌓아 만든 밭은 강원도 산간마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비탈밭이다. 트럭의 번호판을 확인하지 않아도 우리나라가 틀림없다. 그런데 배추밭과 나란히 흐르는 실개천의 물색이 수상하다. 합성이라도 한 것처럼, 눈에 선 에메랄드빛이다.

사진 속 장소는 ‘석탄도시’로 손꼽히던 고장 태백이고, 촬영된 시기는 2017년이다.

광업소들이 문을 닫은 뒤, 비어버린 폐광 터에서 묵묵히 일한 것은 자연이었다. 사람들이 떠나간 빈자리를 보듬어 안고 나무와 풀, 꽃을 키우면서 어느새 ‘자연스러운’ 풍경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 자연스러운 산과 숲 사이로 자연의 색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희거나 창백한 푸른 물이 흐르고, 붉은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남겨진 폐광들에서 비롯된 백화현상과 황변현상 때문이었다.

지나간 시절이 남긴 생채기이거나 아직도 흘리고 있는 누액처럼 보이는 그것들은, 태백에 사는 사진가 박노철의 시선을 아프게 했다. 박노철은 수년 동안 태백 곳곳에 폐광 흔적들을 찾아다니며,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그 생채기를, 누액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자연이 그랬듯 묵묵하고 꾸준하게. 사진가이기 이전에 태백에 사는 지역민의 한 사람으로 그 땅의 현재와 미래에 애가 탔기 때문이다.

박노철의 사진을 본 많은 이들이 태백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했다. 자연 스스로 자정하는 데는 백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폐광지의 자연을 되살려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고, 태백 땅 곳곳에 정화시설들을 세우는 작업이 시작됐다. 오늘 태백의 자연이 자연스러울 수 있게 된 시작점에, 박노철의 사진 시리즈 ‘폐광, 흔적에 길을 묻다’가 있는 것이다.

사진의 선한 영향력을 이야기할 때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애타는 눈으로 혼자 사진기를 들고 폐광터를 돌아다닌 한 사진가와 그가 남긴 저 ‘에메랄드빛 실개천’이 떠오른다. 다음 세대까지도 가동이 이어져야한다는 정화시설들처럼, 박노철은 아직 채 정화되지 않고 남은 ‘흔적’들을 쫓아 우리가 나아갈 ‘길을 묻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박미경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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