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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하이엔드] 이게 종이라고?....박스 쌓고 붙여 만든 경이로운 '시간의 교차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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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면

지난 9월 6~9일 열렸던 프리즈 서울에서는 샴페인 하우스 ‘루이나’의 특별한 전시가 공개됐다. 지극히 평범한 소재인 판지(card board)로 경이롭고 독창적인 세계를 조각해내는 프랑스 아티스트 에바 조스팽(Eva Jospin·47)의 ‘프롬나드(Promenade(s))’다. ‘산책로’라는 의미의 설치 작품으로, 종이로 만들어 서정적이면서도 장대한 풍경이 펼쳐졌다.

올해 프리즈 서울에 전시된 '루이나 카르트 블랑슈 2023 프로젝트'로 탄생한 작품 '산책로' 일부. 프랑스 아티스트 에바 조스팽의 작품이다. Eva Jospin, 4 Fôrets for the Carte Blanche PROMENADE(S), 2022. [사진 Benoit Fougeirol]

올해 프리즈 서울에 전시된 '루이나 카르트 블랑슈 2023 프로젝트'로 탄생한 작품 '산책로' 일부. 프랑스 아티스트 에바 조스팽의 작품이다. Eva Jospin, 4 Fôrets for the Carte Blanche PROMENADE(S), 2022. [사진 Benoit Fougeirol]

1729년 설립된 최초의 샴페인 하우스인 루이나는 2023년 카르트 블랑슈(Carte Blanche) 프로젝트로 에바 조스팽을 객원 아티스트로 초대했다. 에바 조스팽은 루이나의 심장인 프랑스 상파뉴 지방 렝스의 풍경을 고부조(홈이 깊어 평균보다 높게 도드라진 부조)·그림·자수 등으로 재현했다.

루이나의 대표적인 퀴베 샴페인, 블랑 드 블랑 제로보암(Blanc de Blancs Jeroboam) 리미티드 에디션. 병이 담긴 나무 상자에 여러 겹의 판지로 조각한 미니어처 백악갱 장식이 들어있다. 25병 한정.[사진 루이나]

루이나의 대표적인 퀴베 샴페인, 블랑 드 블랑 제로보암(Blanc de Blancs Jeroboam) 리미티드 에디션. 병이 담긴 나무 상자에 여러 겹의 판지로 조각한 미니어처 백악갱 장식이 들어있다. 25병 한정.[사진 루이나]

루이나는 프리즈와 아트 바젤을 포함, 전 세계 30개 이상의 국제 미술 박람회에서 예술가의 작품을 공개하는 카르트 블랑슈 프로젝트를 2008년부터 진행 중이다. 백지 수표·위임장이라는 의미처럼, 재능 있는 아티스트에게 전권을 주고 기량을 뽐내도록 한다. 지난 7일, 프리즈 서울 2023 개막 하루 뒤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에바 조스팽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난 9월 7일 오전. 프리즈 서울 2023 개막 하루 뒤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에바 조스팽을 만나 인터뷰 했다. [사진 Flavien Prioreau]

지난 9월 7일 오전. 프리즈 서울 2023 개막 하루 뒤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에바 조스팽을 만나 인터뷰 했다. [사진 Flavien Prioreau]

왕의 대관식 열리던 땅

프랑스 북부 상파뉴 지역의 중심지이자, 루이나 하우스가 위치한 렝스는 야트막한 구릉 지대와 백악갱(석회 지하 동굴)이 혼합된 지형으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에바 조스팽은 이런 렝스의 떼루아(포도 재배 환경)에서 작업의 실마리를 찾았다.

프랑스 상파뉴 지역 렝스에 위치한 루이나 하우스에 방문한 에바 조스팽. 에바 조스팽은 이 곳의 특별한 자연 환경 등 떼루아에서 작업의 실마리를 찾았다. [사진 Mathieu Bonnevie]

프랑스 상파뉴 지역 렝스에 위치한 루이나 하우스에 방문한 에바 조스팽. 에바 조스팽은 이 곳의 특별한 자연 환경 등 떼루아에서 작업의 실마리를 찾았다. [사진 Mathieu Bonnevie]

물론 단순히 포도밭이 위치한 지형보다, 풍부한 자연경관을 만들어낸 시간에 주목한다. 특히 렝스는 프랑스인들에게는 유명한, ‘왕의 대관식’이 치러졌던 역사적 장소. 작가는 “상파뉴의 테루아에는 자연뿐 아니라 수백 년간 와인을 만들어왔던 인류의 행위, 그 행위 속 시간,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뒤섞여 숨 쉬고 있다”며 “식물과 광물이 가득한 자연 사이 층층이 스며든 시간의 결을 작품에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루이나 샴페인 블랑 드 들랑 에바 조스팽 리미티드 에디션 [사진 JOSEPH JABBOUR]

루이나 샴페인 블랑 드 들랑 에바 조스팽 리미티드 에디션 [사진 JOSEPH JABBOUR]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산책로

에바 조스팽은 지하 공간부터 공중의 세계, 뿌리부터 하늘 등 다양한 층위의 풍경을 병치, 모호하면서도 신비로운 산책길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렝스에 있는 메종 루이나의 풍경이 꼭 그렇다”며 “여기가 땅인가 싶으면 포도나무 뿌리가 보이고, 와인이 숨 쉬는 백악갱은 미로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고 말했다.

프리즈 서울이 진행됐던 지난 9월 6~9일 전시장에 선보였던 에바 조스팽의 설치 작품 ‘프롬나드(산책로)’ 중 일부. 세부 작품명은 걸작(Chef d‘oeuvre_1). [사진 bfougeirol]

프리즈 서울이 진행됐던 지난 9월 6~9일 전시장에 선보였던 에바 조스팽의 설치 작품 ‘프롬나드(산책로)’ 중 일부. 세부 작품명은 걸작(Chef d‘oeuvre_1). [사진 bfougeirol]

에바 조스팽은 그림·조각품·자수 등 작품이 회전목마처럼 돌아가도록 설치, 한 곳에 있으면서도 산책로가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도록 연출했다. 옅은 황갈색 종이는 겹겹이 연출돼,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쌓인 지층 같다. 종이는 그 자체로 나무와 숲을 떠올리게 하고, ‘산책로’라는 타이틀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지극히 평범한 소재인 종이가 경이로운 풍경으로 탈바꿈한 작품은, 단순한 과일인 포도가 환상적 샴페인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은유한다.

여러 겹의 종이를 붙여 자르고 조각해 만든다. 작품 '산책로'의 일부,로 세부 작품명은 '걸작(Chef d'oeuvre _6). [사진 Benoit Fougeirol]

여러 겹의 종이를 붙여 자르고 조각해 만든다. 작품 '산책로'의 일부,로 세부 작품명은 '걸작(Chef d'oeuvre _6). [사진 Benoit Fougeirol]

5~6명 팀, 4개월간 판지 자르고 붙이고

에바 조스팽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판지로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현한다. 우리에게는 택배 상자로 더 익숙한 바로 그 재료다. 그는 “판지는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어 대규모 조각 작품을 만드는데 적합하다”며 “산업적 재료면서도, 누구나 나무라는 원료를 알고 있는 친숙한 소재라는 점이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대규모 작업을 주로 하는 에바 조스팽의 아틀리에에는 5~6명의 팀원이 있다. [사진 Laure Vasconi]

대규모 작업을 주로 하는 에바 조스팽의 아틀리에에는 5~6명의 팀원이 있다. [사진 Laure Vasconi]

판지를 절단하고 풀로 붙인 뒤, 이를 다시 층층이 쌓은 다음 조각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작업에는 전기톱부터 조각기, 체인톱 같은 다양한 도구가 사용 된다. 거의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다는느낌이 들 만큼 거대한 규모로 작업하길 즐기는 그의 아틀리에에는 모두 여성으로 구성된 5~6명이 팀원이 있다. 이번 프롬나드 작품은 팀원들과 함께 약 4개월간 작업한 결과물이다.

종이로 만든 작품이지만, 주로 커터와 조각기, 체인톱 등 다소 거칠고 다양한 도구가 사용된다. [사진 Joseph Jabbour]

종이로 만든 작품이지만, 주로 커터와 조각기, 체인톱 등 다소 거칠고 다양한 도구가 사용된다. [사진 Joseph Jabbour]

“예술은 다양한 관점 포용해야”

최근 전쟁과 정원의 역사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는 그는 다음 작품으로 아비뇽 교황청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후기 고딕 양식의 궁이자, 그 유명한 ‘아비뇽 유수(로마 교황청을 남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이전한 사건)’가 일어났던 장소다.

佛 아티스트 에바 조스팽 인터뷰 #루이나 2023 카르트 블랑슈 참여 #프리즈 서울에서 ‘산책로’ 전시

마지막으로 이번 프로젝트로 어떤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에 대해 질문하자 작가는 “좋은 작품은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기 보다는 관람객이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게 다양한 관점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며 “프롬나드를 통해 서로 다른 세계가 어떻게 추출되는지, 수세기를 걸친 시간이 어떻게 교차하는지 각자의 상상에 따라 이리저리 거닐어 보길 바란다”고 전했다.

에바 조스팽의 이전 작품. Eva Jospin, The Christian Dior Spring-Summer 2023 Show, 2022. [사진 Adrien Dirand]

에바 조스팽의 이전 작품. Eva Jospin, The Christian Dior Spring-Summer 2023 Show, 2022. [사진 Adrien Dir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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