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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 안 쓰면, 학점 깎아요"…'표절' 걱정했던 대학이 바뀐다 [생성형 AI 임팩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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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인공지능(AI)을 사용해 작품을 창작해보세요.”
성균관대 영상학과 이혜민 교수가 지난 학기 강의에서 낸 과제다. 그림을 그리는 생성형 AI ‘달이(Dall-E)’나 ‘미드저니(Midjourney)’를 이용해 작품을 만들어 보라는 주문이었다. AI와 학생들의 ‘협업’ 결과는 톡톡 튀었다. 한 학생은 즐겨 쓰는 향수를 글로 표현하고 이를 AI가 그림으로 그린 작품을 제출했다. 군인, 범죄자, 우주비행사 등 수십 개 직업으로 변신한 학생의 모습을 AI가 그려낸 것도 있었다. 수업에 참여한 한 학생은 “AI의 가장 큰 장점은 빠르게 다작(多作)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는 예술가의 개념이 개발자나 엔지니어로 확장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대학가에 번지는 ‘AI의 일상화’

지난 1학기 성균관대 영상학과 '인공지능과 예술' 수업에서 한 학생이 생성형 AI 도구 DALL·E 2를 사용해 만들어낸 작품. 이혜민 교수 제공

지난 1학기 성균관대 영상학과 '인공지능과 예술' 수업에서 한 학생이 생성형 AI 도구 DALL·E 2를 사용해 만들어낸 작품. 이혜민 교수 제공

동화책이나 영화 시나리오도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착하고 용기 있게 살아야 한다는 내용의 동화’를 챗GPT가 스토리로 만들고, 그림 AI가 삽화를 그렸다. 이혜민 교수는 “이제는 작품 활동에서도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명령어를 잘 만드는 것이 중요한 시대”라고 설명했다.

지난 13일 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한 ‘대한민국 초거대 인공지능(AI) 도약 회의’에서 언급된 ‘전 국민 AI 일상화’는 일부 대학가에선 현재 진행형이다. 사회 각 분야의 AI 기본기를 다지고 초거대 AI 기업을 키우려는 정부 목표를 위해선 AI 교육이 필수적이라는 진단이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챗GPT의 등장 때 ‘과제 표절’ 등 걱정이 앞섰던 대학이 이제 그 활용 방안을 적극적으로 찾는 이유다.

“AI 사용으로 학습 효율성 높아졌다”

건국대 정보통신대학원 정승익 교수는 지난 학기 전자공학과 강의에서 챗GPT 답변을 필수로 포함한 에세이를 제출하게 했다. 강의 계획서에는 “챗GPT를 활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감점하겠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는데, 그 계획서 역시 정 교수가 챗GPT를 써서 작성했다고 한다. 정 교수는 “강제해서라도 챗GPT 활용법을 트레이닝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챗GPT 도움을 받으니 전자공학도에겐 생소할 수 있는 예술 전문 용어를 활용한 에세이도 제출됐다”고 했다.

대학가에선 AI 활용이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다. 성균관대의 한 재학생 설문조사(재학생 219명 참여)에서는 33.3%가 “코딩과 프로그래밍에 챗GPT를 쓴다”고 답했다. 글 쓰기(30.5%), 아이디어 생성(18.3%), 전공·시험공부(16.9%) 등에도 활용하고 있었다. “AI를 사용해 학습 효율성이 높아졌다”는 답변은 86.8%에 달했다. 이상은 성균관대 교육개발센터 부센터장은 “챗GPT는 학생들의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다. 교수와 학교가 올바른 사용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챗봇, 특별한 기회로 받아들여야”

해외에서도 챗GPT 허용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국제인증 교육 프로그램인 ‘국제 바칼로레아(IB)’는 학생들이 제출하는 글에서 챗GPT를 활용할 수 있게 했다. IB 측은 “챗봇을 특별한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며 “다른 사람이나 인터넷에서 가져온 아이디어를 사용하는 것과 똑같기 때문에 출처를 명시하면 된다”고 밝혔다.

생성형 AI 도입이 교육 환경을 바꿀 수 있다는 게 대학가의 전망이다. 정승익 교수는 “그동안 교육이 답 찾기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제는 좋은 질문을 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이혜민 교수는 “AI 시대에는 AI 리터러시(문해력)를 갖춰야 한다. AI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 AI가 만든 결과물을 잘 해석하는 능력도 필요하다”고 했다.

대학 과제와 시험도 글쓰기 중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리포트 제출보다 토론과 발표를 통해 학생의 이해도를 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작문 교육 전문가인 장성민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챗GPT 이후의 글쓰기는 글 자체가 아니라 글을 쓰는 과정에서의 사고력이 중요해졌다”며 “챗GPT로 작문의 개념이 ‘쓰기’에서 ‘퇴고(推敲·글을 고치고 다듬는 것)’로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표절·악용 우려 여전…수업·시험 바뀌어야

챗GPT 개발사 오픈AI. AP=연합뉴스

챗GPT 개발사 오픈AI. AP=연합뉴스

생성형 AI는 대학 과제뿐 아니라 연구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학술 논문 작성을 돕는 전문 AI가 개발됐고, 세계적 학술지인 네이처지는 아예 “챗GPT를 사용할 경우 논문에 명시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전창배 국제인공지능윤리협회장은 “챗GPT를 이용하면 수개월 걸리던 논문 작업이 수일로 줄어든다. 통계 분석, 번역, 요약 등을 챗GPT로 활용하고 대신 연구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챗GPT가 표절에 악용될 수 있다는 문제점은 여전히 남아있다. 지난 7월 영국의 명문대 그룹으로 불리는 ‘러셀그룹’ 대학 24곳은 생성형 AI에 대한 공동 지침을 만들었다. 평가 방식에 ‘윤리적 AI 활용’ 여부를 반영하고 적절한 활용법을 가르치면서 모범 사례를 공유하자는 내용이다. 한국 대학들도 챗GPT 윤리 강령을 만들고 있다. 국민대는 올해 2월 국내 대학 최초로 챗GPT 윤리 강령을 선포했다. AI 정보의 진실을 확인하도록 하고, 과제 제출 시 AI 활용 여부를 밝히는 내용 등이 담겼다.

하지만, 이런 지침으로는 AI의 부작용을 막기에는 한계가 있으니 시험과 수업 방식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최근 호주에서는 AI가 고난도 시험 문제를 풀 수 있으니 구술평가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홍문표 성균관대 입학처장은 “챗GPT를 금지하는 것은 시대적인 흐름에 역행하는 거다. 챗GPT가 대체할 수 없는 문제 해결 능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기르고 평가할 수 있도록 교수법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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