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술 빚고 김치 담근 선비 김유, 그가 품은 큰 뜻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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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16세기 안동 지역 요리책 『수운잡방』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16세기 경북 안동에 살던 한 사족 남성이 요리책을 썼다. 유교 지식의 자장 내에 있는 선비로는 이례적인데, 그의 이웃에는 농암 이현보(1467~1555)와 퇴계 이황(1501~1570)이 살고 있었다. 남성의 이름은 탁청정(濯淸亭)이라는 호를 가진 김유(金綏·1491~1555)이고 책 이름은 『수운잡방(需雲雜方)』이다. 『수운잡방』에 실린 음식은 모두 121종류. 술이 60종류로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장류·김치류·식초류·과자·탕 등이다. 가양주의 비중이 큰 것은 손님 접대가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사대부로는 드물게 조리서 집필
장류·식초·탕 등 음식 121종 담아

“한번 사는 인생인데 즐겁게” 선언
벼슬길 그만두고 부모 봉양 힘써

친가·외가 모두 의학·농학서 남겨
주변 대접하며 자녀들 미래 기약

1986년 450여년 만에 공개

김유의 『수운잡방 』에 실린 요리 일부를 재연한 모습. 간장 2종, 전어탕, 치저, 집산적, 삼색어아탕이다. [사진 수운잡방연구원, 문화재청, 안동시, 중앙포토]

김유의 『수운잡방 』에 실린 요리 일부를 재연한 모습. 간장 2종, 전어탕, 치저, 집산적, 삼색어아탕이다. [사진 수운잡방연구원, 문화재청, 안동시, 중앙포토]

김유의 3남 김부륜의 종가에서 450여년을 보관해 오던 『수운잡방』이 1986년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자 안동 지역 사족 문화의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게 되었다. 요리서에 언급된 식품 재료의 생산과 이동 경로 등의 물질적인 것부터 음식을 대하는 태도와 사상에 이르기까지, 500년 전의 음식문화를 읽어내려는 의욕이 줄을 이었다. 관심을 더 확장하여 향촌 사족 김유의 사상과 혼인 관계, 그리고 가족생활까지 엿보게 되었다.

조선시대 학인(學人)은 대개 벼슬길에 나가 명성을 얻거나 아니면 학문을 통해 ‘자신’을 완성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꿈꾸었다. 그런데 출사(出仕)하여 명성을 얻는 방법이 일률적이지 않듯이 학문을 옆에 끼고 재야의 삶을 꾸려가는 방식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탁청정 김유는 벼슬길 진입에 실패하자 삶의 목표를 바꾸게 된 경우다. 그는 “한번 사는 인생 즐겁게 하는 것이 어떤가. 꼭 세상의 명예를 뒤쫓을 필요가 있을까”라고 한다. 35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김유는 활쏘기에 능해 무과에도 여러 번 응시하지만 모두 실패하여 과거 보기를 아예 포기한다. 이참에 벼슬길에 나간 형 김연(1487~1544)을 대신하여 부모 봉양을 자신의 임무로 삼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이웃 선비 퇴계는 “출세에는 비록 뜻을 접었지만 향리에서 스스로 자족하는 삶을 살았네”라며 인생 총평을 한다.(『퇴계집』 46 ‘생원 김유의 묘지명’)

탁청정, 스스로 맑은 선비 자임

2015년 『수운잡방』 음식을 현대화한 호텔신라와 경상북도. [사진 수운잡방연구원, 문화재청, 안동시, 중앙포토]

2015년 『수운잡방』 음식을 현대화한 호텔신라와 경상북도. [사진 수운잡방연구원, 문화재청, 안동시, 중앙포토]

김유는 탁청정의 호가 말해주듯 스스로 충실한 맑은 선비이기를 자임했다. 탁청(濯淸)이란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라고 한 공자의 말에 연원을 둔 것으로, 물이 어떤가에 따라 용도가 달라지듯이 자신 또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묻고 있다. 이렇게 세상의 명예를 포기하고 ‘즐거운 인생’을 추구한 그에게 더 큰 명예가 찾아온 것은 500년의 기다림이 있었지만 가히 역설적이다. 반복되는 일상사를 일정한 체계를 통해 이해하고 기록한 『수운잡방』이 준 선물이다.

유교 지식인들의 보편적인 글쓰기와는 전혀 다른 조리서 저술에는 전제되어야 할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사물에 대한 관찰과 분석, 실험이라는 과학 기술적인 접근이 필요하고, 맛을 구별하고 차별화할 수 있는 안목에다 음식에 대한 기호와 미각이 있어야 한다. 또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닌 음식 취향을 논할라치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김유의 음식책을 가능케 한 지식의 계보와 연원, 그리고 집안의 경제 상황이 궁금해진다. 유교 지식인 김유가 조리서 『수운잡방』을 쓰게 된 전방위적인 관심이라 할 수 있다.

어머니가 전수한 손끝의 맛

『수운잡방』 표지를 열면 정욕을 줄이고 성색을 절제하자(少情 寡欲, 節聲色薄滋樂. 時有四不出, 大風 大雨 大暑 大寒也)는 등의 내용이 나온다. [사진 수운잡방연구원, 문화재청, 안동시, 중앙포토]

『수운잡방』 표지를 열면 정욕을 줄이고 성색을 절제하자(少情 寡欲, 節聲色薄滋樂. 時有四不出, 大風 大雨 大暑 大寒也)는 등의 내용이 나온다. [사진 수운잡방연구원, 문화재청, 안동시, 중앙포토]

과학적 글쓰기의 한 방식인 요리서 저술의 배경에 주목하다 보면 의서(醫書) 및 농서(農書)를 집필한 김유의 친·외가 선조를 만나게 된다. 김유의 어머니 양성(陽城) 이씨로 내려온 지식 전통에는 조선 전기의 과학자 이순지(1406~1465)가 있다. 이순지는 천문학과 수학에 기초한 조선의 역법 『칠정산외편』를 저술했는데, 그의 손녀가 김유의 어머니다. 손녀 이씨는 안동의 부유한 사족 김효로와 혼인하여 2남 2녀를 낳았고, 90이 넘도록 장수했다.

김유는 거의 전 인생을 어머니와 함께하면서 손끝으로 전해지는 맛을 의논하고 기록한 것이다. 친가 쪽으로는 조선 개국기의 대표적인 의학자 김희선(?~1408)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김유의 종고조부다. 광산 김씨 안동 입향조인 고조 김무(金務), 그 형이 바로 『향약제생집성방』을 저술한 김희선이다. 외증조와 종고조의 전공과 김유의 음식책은 과학과 실용을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방법론적으로 매우 가깝다.

과학과 실용, 그리고 풍류

김유가 노닐던 탁청정 전경. 탁청정은 김유의 호(號)이자 정자 이름이다. [사진 수운잡방연구원, 문화재청, 안동시, 중앙포토]

김유가 노닐던 탁청정 전경. 탁청정은 김유의 호(號)이자 정자 이름이다. [사진 수운잡방연구원, 문화재청, 안동시, 중앙포토]

누구보다 중요한 가족으로는 김유에게 다방면의 유산을 남긴 고모부이자 양부(養父)인 김만균이 있다. 안동 처가 마을에 살던 김만균은 자식이 없어 처조카인 김유를 양자로 삼아 어릴 때부터 사랑으로 양육하고 교육한다. 그런데 김만균의 아버지 김담(1416~1464) 또한 과학자로 이순지와 함께 『칠정산외편』을 저술한 인물이다. 세종 시대의 과학 사업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순지와 김담은 동료로서의 인연을 혼인 가족으로 연장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순지의 손녀가 김유의 어머니이고, 김유의 고모가 김담의 며느리이다.

탁청정 현판. [사진 수운잡방연구원, 문화재청, 안동시, 중앙포토]

탁청정 현판. [사진 수운잡방연구원, 문화재청, 안동시, 중앙포토]

김유는 양부 김만균의 교육을 통해 자연 및 사회 현상에 대한 관찰과 기록, 해석의 작업이 갖는 의미를 알게 된다. 퇴계에 의하면, 김만균은 성품이 곧고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여유와 품격을 갖춘 인물이었다. 부유하기로 이름난 그의 재산을 받은 김유는 친가의 상속분에 더하여 그 지역에서 으뜸이었다.(『퇴계집』 46) 요컨대 『수운잡방』은 가족적 전통에서 길러진 과학과 실용에 대한 감각이 풍류와 여유의 인생 철학을 만나 빚어진 산물이다.

“사물을 기를 때 필요한 게 음식”

탁청정에 걸린 시판. 김유가 퇴계로부터 받은 시를 새겨 놓았다. [사진 수운잡방연구원, 문화재청, 안동시, 중앙포토]

탁청정에 걸린 시판. 김유가 퇴계로부터 받은 시를 새겨 놓았다. [사진 수운잡방연구원, 문화재청, 안동시, 중앙포토]

책 이름 『수운잡방』에서 수운(需雲)은 『주역』의 5번째 괘인 수괘(需卦)에서 온 것인데, 수는 음식의 도(道)다. “사물의 어린 것은 길러주기를 기다려 이루어지니, 사물을 기를 때 필요한 것은 음식이다.”(『주역전(周易傳)』 수괘) 또 “수(需)는 구름이 하늘에 오르는 격이니, 군자가 음식으로 연락(宴樂)하는” 것이다. 수괘의 대의(大意)는 ‘기다림’인데, 음식을 먹으면서 기체를 양성하는 가운데 큰 뜻이 이루어질 것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수운은 구름 상태로 기다린다는 의미로 연회와 같은 음식을 통한 행사를 상징한다. 김유는 무엇을 기다렸을까.

김유의 호(號)이면서 정자 이름이기도 한 탁청정에는 인근에 살던 선비들이 모여 놀았고, 안동 예안을 지나던 선비들이 들러가는 곳이었다. “주방에는 맛있는 음식이 즐비하며 항아리엔 향기로운 술이 넘쳐나네. 그것으로 조상을 섬기고 부모를 봉양하며 잔치를 즐기었네. 반갑고 귀한 손님이 모여드는 것을 생전의 그는 크게 기뻐했네.”(『퇴계집』46) 김유의 정자에는 많은 명사가 방문했는데, 정장(亭長)이 가장 공을 들인 명사는 농암 이현보와 퇴계 이황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김유는 농암 이현보의 딸을 맏며느리로 맞이했고, 자신의 딸은 퇴계 이황의 조카와 혼인시켰다. 그리고 김유는 자질(子姪) 모두를 퇴계의 문하로 들여보낸다. 그들은 모두 학덕(學德)을 두루 갖춘 ‘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로 불리며 지역의 품격을 대변하는 인물로 성장했다.

“시론(時論)에 동요하지 마라” 권고

김유의 자손을 일컫는 ‘오천칠군자’에서 유래한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군자마을. [사진 수운잡방연구원, 문화재청, 안동시, 중앙포토]

김유의 자손을 일컫는 ‘오천칠군자’에서 유래한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군자마을. [사진 수운잡방연구원, 문화재청, 안동시, 중앙포토]

김유가 선비들을 불러 음식을 대접하며 우의를 다진 것은 궁극적으로 자녀와 조카들의 미래를 기다린 셈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김유의 조카이자 김연의 장남인 김부필(1516~1677)은 10개 항목으로 된 ‘계자첩(戒子帖)’을 지어 부모 대가 남긴 전통을 재확인한다. 조선시대 학인들의 보편적인 이상을 담고 있지만 3개 항목은 이 가족의 특수성을 보인다.

즉 인정을 중시하고 과격한 행동을 하지 말 것, 도량을 키워 화를 내는 일이 없도록 할 것, 시론(時論)에 동요하지 말 것이 그것이다. 바로 김유가 원하던 것이다.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욕심을 줄이자. 성색을 절제하고 쾌락에 빠지지 말자. 이런 네 가지 경우에는 바깥출입을 하지 말자. 바람이 사나운 날, 큰비 있는 날, 무더운 날, 매섭게 추운 날.”(『수운잡방』 첫 장)

현존하는 『수운잡방』은 25매의 한지에 행서와 초서 두 가지 문체로 기록된 한문 필사본이다. 조부의 유묵(遺墨)에 손자 김령(1577~1641)이 전체 4분의 1 분량을 추가하여 볼륨을 높인 것으로, 80여년의 시차를 보인다. 김유가 여러 갈래의 조상으로부터 얻은 관찰과 실험의 방법으로 조리서를 썼다면 김령은 조부의 성과에 완성도를 높이고자 한 것이다. 조손(祖孫)이 함께한 저술이라는 점에서도 『수운잡방』의 역사적 위치는 독보적이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