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손민호의 레저터치

“한국에서 바둑을…” 루이와 스미레의 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손민호 기자 중앙일보 팀장

손민호의 레저 터치’ 외 더 많은 상품도 함께 구독해보세요.

도 함께 구독하시겠어요?

손민호 레저팀장

손민호 레저팀장

1990년 중국 바둑기사 장주주(江鑄久·61)는 미국으로 날아간다. 천안문 사태에 참여한 경력이 논란이 돼 정상적인 바둑기사 활동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그해 장주주의 연인이자 중국 여자바둑 최강자 루이나이웨이(芮乃偉·60)도 중국을 떠난다. 애인이 있는 미국에 가고 싶었지만 일단 일본을 선택한다. 일본에서 프로기사로 활동하면서 후일을 도모하고자 했다.

하나 루이의 계획은 처음부터 틀어졌다. 일본기원에서 루이의 기전 참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루이가 워낙 강해 일본 여자기전을 싹쓸이할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루이는 세계 최초로 9단에 오른 여자기사다. 오갈 데 없던 루이를 받아준 게 한국이다. 1999년 4월 장주주와 함께 입국해 부부가 한국기원 객원기사 신분으로 한국 기전에 참가한다. 루이 부부의 국경을 뛰어넘는 반상의 러브스토리는 당시 국내외에서 큰 화제가 됐다.

한국에서 프로기사 활동을 한 루이나이웨이 9단과 한국에서 바둑기사를 하고 싶다고 밝힌 스미레 3단(오른쪽). [사진 한국기원]

한국에서 프로기사 활동을 한 루이나이웨이 9단과 한국에서 바둑기사를 하고 싶다고 밝힌 스미레 3단(오른쪽). [사진 한국기원]

이듬해 루이는 최고 권위의 국내 기전 국수배에서 당대 최강 이창호와 조훈현을 연파하고 우승컵을 거머쥔다. 루이의 우승 소식은 중국 국영 CC-TV가 저녁 뉴스에서 보도했을 정도로 중국에서도 높은 관심을 보였다. 루이는 한국에서 활동한 12년8개월간 모두 29번 우승했다(여류기전 27회, 통합기전 2회). 그리고 2011년 11월 고향을 떠난 지 21년 만에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2023년. 일본의 나카무라 스미레(仲邑菫·14) 3단이 한국기원에 객원기사 활동 신청서를 제출했다. 스미레는 열 살이 되던 해인 2019년 일본기원의 영재특별채용 제1호로 입단한 천재 소녀다. 올 2월엔 13세11개월 나이로 제26기 여류기성전에서 우승해 일본 바둑 최연소 우승 기록을 갈아치웠다. 한국하고도 인연이 깊다. 2017년부터 한종진 바둑도장에서 2년 가까이 유학했다.

스미레의 한국 활동이 확정된 건 아니다. 13일 한국프로기사협회는 추천했지만, 한국기원 운영위원회를 거쳐 이사회도 통과해야 한다. 다음 달 말께 결과가 나온다.

그래도 이미 뜻깊은 일이다. 스미레가 다른 나라에서 바둑기사로 활동하겠다고 선언한 최초의 일본 기사이기 때문이다. 현대 바둑 종주국을 자처하는 일본은 내심 속이 쓰릴 테다. 일본기원 고바야시 사토루(小林覺) 이사장도 “나카무라 스미레 여류기성의 도전을 응원한다”면서도 “차세대 스타 기사의 이적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다”고 속내를 내비쳤다.

한국으로선 뿌듯해할 만하다. 한 시절 한국은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갔었기 때문이다. 조남철·김인·윤기현·하찬석·조훈현 등 초창기 고수 상당수가 일본 유학파 출신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국제 미아가 됐던 루이를 품어줬던 것처럼, 한국에서 바둑을 배워 프로기사가 된 스미레도 한국이 안아주길 기대한다. 한국은, 적어도 바둑에서만큼은 꿈의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