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함락을 원한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문성복)은 신탁을 받아, 순수한 맏딸 이피지니아(홍지인)를 제물로 바친다. 분노한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여승희)는 남편을 살해한다. 아버지를 잃은 남매 오레스테스(남재영)와 엘렉트라(신윤지)는 또 다른 복수의 칼을 간다.
기원전 458년 고대 그리스 최대 축제였던 디오니소스 축제 비극 경연의 우승작은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이었다. 오늘날 비극 예술의 원형이자 엘렉트라 콤플렉스(딸이 어머니를 증오하고 아버지에게 집착하는 심리)를 낳은 작품이다. 이를 현대화한 연극 ‘이 불안한 집’이 지난달 31일 서울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해 24일까지 관객을 만난다.
연극 '이 불안한 집'
"지금 본다" 인증 잇따른 5시간 대작
영국 극작가 지니 해리스의 2016년 작품을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손님들’, 2017) 수상 연출가 김정(39)이 이번에 한국 초연했다. 원작처럼 3부 구성이다. 고전을 재해석한 1‧2부, 현대 정신병원을 무대로 엘렉트라 콤플렉스 환자와 의사를 그린 3부까지 공연 시간이 무려 5시간에 달한다. 요즘 드문 대작이다. 공연계에선 “지금 보고 왔다”는 관람인증이 SNS에 잇따른다.
아가멤논 왕가의 패륜적 복수극이 2개의 경사로로 연결된 2층 구조 무대에서 롤러코스터 타듯 펼쳐진다. 아가멤논의 피로 적셔진 거대한 바위 세트, 그리스 신의 석조 얼굴이 내려다보듯 연출한 박력 있는 무대다.
원작은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죽여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데, 이 연극의 남성들은 여성들 앞에서 무력하다. 만만찮은 대작에 덤벼든 젊은 연출가의 패기를 반기는 분위기다. 심재민 연극평론가는 “고전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의 복권을 신들이 옹호하는 전개라면, 김정 연출은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페미니즘 색채, 퀴어까지 가져왔다. 깊이감은 아쉽지만, 영상세대에 호소할 만한 대중적 연출”이라 평가했다. 연극평론가 백로라 숭실대 교수(희곡 및 공연학)는 “가족 내 폭력의 고리를 고대부터 반복돼온 원형적 트라우마와 연결하는 지점에서 설명이 불친절하다”면서도 “희랍극(그리스 고전극)에서 기존 연출들이 어려워하는 코러스를 잘 처리했다. 일상성을 가미한 신체 움직임으로 비극적 상황, 분노, 슬픔, 공포를 잘 드러냈다”고 말했다. 춤추듯 움직이는 배우들이 말러 교향곡 애국가, 랩을 오가며 극 전체에 리듬을 불어넣어서다.
"신까지 다룬 서사, 돌진하는 신체성 살려"
지난 7일 전화 인터뷰에서 김정 연출은 2500년 살아남은 고전의 힘을 “신의 영역까지 다룬 방대한 서사”와 “인간 본성을 흔드는 연극성”에서 찾았다. “연극성이란 실제 사람이 온몸 바쳐 돌진하는 신체성이라 생각해요. 이야기 전개에 집중한 볼거리는 유튜브‧TV에도 많은데 왜 극장을 찾아와야 할까. 트렌디한 드라마적 연기와 다른 연극적 표현들을 해내고 싶었죠.”
아가멤논 역 문성복은 1m87cm, 클리템네스트라 역의 여승희는 1m73cm의 큰 키다. 김 연출은 “고대의 원형처럼 거대한 인간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무대도 2층 구조로 신들의 조각상이 서있는 듯한 구도를 만들었다”면서 왕비의 시녀 이안테(성근창)와 파수꾼(송철호)을 남성 배우로 캐스팅해 퀴어 정사신을 연상시킨 부분도 “주연 배우들의 큰 키와 강렬한 존재감을 나눠 가져가기 위해 여성 배역을 남성으로 바꿨다”고 했다. "해리스 원작의 폭력‧마약‧섹스가 범벅된 퇴폐적 부분을 털어내고 중심 서사에 집중했다"면서다. 이 작품의 해외 공연도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단다.
대사를 노래처럼 흥얼댈 때의 리듬은 배우들이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리듬감이 있으면 장시간을 버틸 수 있죠. 5시간 극은 처음이다 보니 사운드와 대사 크기의 균형을 공연하면서 찾아갔어요.”
"명맥 끊긴 우리 사극에도 도전하고파"
김 연출은 3막의 현대까지 관통하는 주제를 ‘희망’이라고 했다. “마지막 이피지니아의 말이 열쇠였죠. 폭력과 전쟁이 멈추지 않는 혼돈의 세상에서 저 약한 아이도 멈추라고 말하잖아요. 어쩌면 작은 사탕 같은 것 하나가 비참한 세상을 바꾸는 건 아닐까. 관객에게 그 답을 맡기고 싶었어요.”
5시간 넘는 극도 하나의 체험이라는 그는 해외엔 이런 공연이 많다면서 우리 관객에게도 이런 선택지가 늘어나길 바란다고 했다. 이번 도전에 대해 “내가 시도하고 설득력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저 뿐 아니라 다음 세대 창작자가 할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는 그는 “한 시절을 풍미했지만 지금은 명맥이 끊긴 우리 사극에도 도전하고 싶다. 문학적 말들, 갈피를 못 잡는 우리 시대 이전의 굵직한 이야기로 현재를 반추해보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