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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도 못 건너던 공황장애…이젠 해외여행 간다, 의외의 비결

중앙일보

입력

쓰임새 많은 VR 콘텐트

영화 ‘그란 투리스모’의 한 장면.

영화 ‘그란 투리스모’의 한 장면.

# 17인치 화면 앞에 앉아 매일같이 게임 속 레이싱 트랙을 시속 320㎞로 달렸다. 19살 소년은 게임 초고득점자 경주 ‘GT아카데미’에서 최연소 우승자가 되고, 실제 닛산 485마력 슈퍼카 GT-R의 운전대를 잡고 영국 실버스톤 서킷을 달리는 기회를 갖게 된다. 지금 그는 프로 레이서로 활약 중이다. 오는 20일 개봉하는 영화 ‘그란 투리스모’의 실존인물 잔 마든보로 얘기다.

# 공황장애가 있는 A씨에게 다리를 건너는 건 불가능했다. 해외여행은 꿈도 못 꿨다. 인천대교를 건너 공항까지 갈 수 없었으니까. 그래도 A씨는 가상의 다리라도 건너보자며 헤드셋을 끼고 연습했다. 올해 초 A씨는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두 사연엔 공통점이 있다. 불가능을 가능케 만들어 준 가상현실(VR) 콘텐트다. 현실에선 경제적 어려움, 병적 증상으로 불가능했던 상황이 가상현실에선 언제든 재생, 멈춤, 되감기가 가능하다. 그래서 VR이 조작이 가능한 가짜세계라는 것쯤은 다 안다. 그런데도 성공스토리를 만들어낸 힘은 ‘경험치’다. 가짜지만 현실 못지 않은 경험을 쌓은 셈이다.

비결은 VR의 ‘현존감’에 있다. 현존감은 VR헤드셋을 끼고 바라본 가상공간의 환경을 현실처럼 느끼는 것을 말한다. 한정엽 홍익대 일반대학원 AI실감미디어콘텐츠학과장은 “현존감 중에서도 블랙홀 같은 미지 세계를 탐험하는 게 아닌 실제 있을 법한 상황을 경험하는 ‘현실기반 현존감’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몰입감은 현존감을 더 높여준다. 김주연 숭실대 건축학부 교수는 “인간의 몰입감은 다른 감각보다 시각이 70% 이상을 차지하는데 VR콘텐트에선 시각요소가 다수를 차지해 몰입감이 높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현실기반 현존감을 살린 VR콘텐트는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명화 모나리자와 같은 예술작품, 문화재를 VR로 관람하거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VR체험관에서 지진 등 재난안전 교육을 하는 등 문화, 교육, 제조업, 엔터테인먼트 다방면에서 활용된다. VR콘텐트 개발이 활발해지는 건 역설적으로 VR기기 만으로는 충분한 현존감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재학 상명대 계약교양교육원 교수는 “현존감을 제고하는 데 있어 헤드셋 같은 VR기기 개발은 아직까진 한계가 있다”며 “시나리오나 감각적 요소 등 VR콘텐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전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시장조사업체 프레지던스리서치는 VR시장이 올해 292억 달러에서 5년 뒤 662억 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중 교육, 의료 분야의 성장률이 두드러진다. 한정엽 교수는 “연습삼아 할 수 없거나 절대적으로 현존감이 느껴질 정도의 연습이 필요한 현장,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 재연이 불가능한 경우가 VR콘텐트에 잘 맞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장조사기관 IDC에 따르면 아태지역 AR·VR 지출 중 2022년~2026년 5년간 연평균 성장률이 높은 산업군은 전문서비스(41.5%)와 의료산업(39.9%) 분야다.

군사나 재난 분야도 유망하다. 고속정을 타고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돌아가던 중이었다. 갑자기 함정 바닥에 원인 모를 천공이 생겼다. 바닷물이 순식간에 기관실로 밀려들어왔고 기관이 고장나 제어가 안된다. 탈출하기 위해 구명조끼부터 찾으려 했지만 2m가 넘는 파도와 해무에 시야조차 확보가 어렵다. 함정 손상통제 교육훈련 시나리오를 각색한 내용이다. 연습을 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이지만 대비와 반복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특성 때문에 국방 분야 VR콘텐트가 관심을 끈다. 항공 정비훈련, 비행체험 콘텐트(공군), 손상통제 교육훈련(해군), 재난훈련용 등이 있다. 실제 전투기 F-15K, KF-16 정비훈련에 활용도 한다.

재빠른 행동대응이 필수인 전시상황, 테러, 화학사고에 있어 VR 훈련은 더 효과적이다. 머리로는 아는데 몸에 익숙지 않을 경우 즉각 대처가 어려울 수 있다. 미 교육학자 에드가 데일의 ‘경험의 원추’ 이론에 따르면 VR과 같은 실감형 교육은 아날로그 학습 대비 2.7배 이상 학습효과가 나타난다. 국방·재난 전문 VR콘텐트 제작업체 한길씨앤씨 곽승호 이사는 “인공지능(AI) 기술로 상호작용도 가능케 해 작전명령 지시 등 협업 훈련의 몰입도를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현존감은 의학 치료에도 효과적이다. 정신의학 분야가 대표적이다. 인지재활(치매), 인지행동(공황장애, 사회불안장애) 치료에 활용된다. 가령 공황장애의 경우 사람이 많은 지하철, 비행기 등 가상으로 구현한 공공장소에 반복적으로 노출해 치료하는 식이다. 오주영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VR치료가 약물치료에 못지 않은 효과를 보이고, 약물 부작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가상현실 기반 사회불안장애, 공황장애 VR치료는 국내 최초 신의료 기술 허가를 받았다. 이외 훈련상황 재연에만 천문학적 비용이 드는 경우라도 VR은 구애받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다.

결국 꿈을 실현시켜줄 VR콘텐트의 힘은 시나리오에 있다. 실제 업체들은 시나리오 제작에만 6개월 이상 공을 들이고, 현장 경험자인 도메인 전문가에게 자문도 받는다. 이재학 교수는 “얼마나 실제와 가깝냐보다 VR활용 목적에 부합하는 정도를 높이고, 기대효과에 부응하는 데 중점을 둬야 한다”며 “설계과정에서 음향, 온도 등 상황의 맥락적 요소도 적극 고려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주연 교수는 “VR콘텐트는 사용자의 연령대, 경험수준 등에 맞게 개발하고 공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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