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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엔 민어 가을엔 자연버섯…계절·지역 담은 밥상 ‘얼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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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6호 24면

이택희의 맛따라기

왼쪽 위부터 Z 방향으로 콩국, 월과채, 열무보리밥과 가리비, 숙성회, 이베리코 목살구이, 장어구이, 민어전과 섭산삼, 표고솥밥·섭국 반상, 셔벗. [사진 이택희]

왼쪽 위부터 Z 방향으로 콩국, 월과채, 열무보리밥과 가리비, 숙성회, 이베리코 목살구이, 장어구이, 민어전과 섭산삼, 표고솥밥·섭국 반상, 셔벗. [사진 이택희]

조리대와 마주한 바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다. 넉넉한 체격의 요리사가 크고 두터운 손으로 잣 알갱이를 쥐고 강판에 갈아 음식에 고명을 올렸다. 일선에서 물러난 어느 정치인 별명이 떠올랐다. ‘여우곰’ 또는 ‘곰탈여우’라 했다.

6~7년 전 그가 절판된 어떤 요리책을 가지고 있는지 물었다. 꼭 필요한데 파는 데가 없다고 했다. 마침 있어서 빌려줬다. 책을 복사할 줄 알았더니 휴대전화 카메라로 모든 페이지를 촬영했다고 한다. 음식 사진이 모두 컬러이고, 전화기에 담아두면 늘 찾아볼 수 있어 그랬다 한다. 고 강인희 교수가 남긴 역저 『한국의 맛』이다. 속표지 빼고도 548페이지나 되는 책이다.

곰살맞고 느긋한 그는 집요하고 섬세한 면도 있다. 그가 여의도에 한식당 ‘얼쑤 비스트로’를 이달 초 열었다. 그의 요리인생 시즌3의 개막이다. 슬로건을 “계절과 지역을 담은 음식과 우리 술”이라고 내걸었다. 디지털판 유료 ‘중앙일보 플러스’의 ‘가족과 함께: 완벽한 한 끼 페어링’이라는 코너에 2022년 11월부터 4주마다 6회 연재한 자신의 글 주제를 그대로 현장에 옮긴 개념이다.

시험운영 중인 8월, 아홉 가지로 이어지는 ‘계절 맡김차림’(8만9000원) 식사를 두 차례 했다. 조성주(39) 오너셰프가 차린 밥상의 순서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장단콩국 곤약면: 파주 장단콩을 불려 일부러 약간 거칠게 간 콩국에 곤약묵을 채 쳐서 말았다.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노란 콩국은 고소하면서 가는 알갱이가 혀에 붙는다.

②월과채: 반달썰기 한 애호박과 채 친 표고·소고기양지를 따로 볶고, 밀전병 채를 섞어 연유·유자청이 들어간 겨자소스로 무친 다음 잣을 강판에 갈아 고명으로 올린 여름음식이다.

③열무물김치에 만 보리밥과 참가리비 숙회: 보리풀로 담가 잘 익은 열무물김치에 깡보리밥을 말았다. 살이 드물게 큰 참가리비는 강원도 고성에서 양식한 걸 쓴다고 한다. 더운 여름 날씨를 감안해 성질이 찬 음식을 준비했다. 김치 맛있게 담그는 요리사 솜씨가 잘 살아난 음식이다.

④숙성회 모둠: 삼치(숙성 6일)·고등어(2일)·줄무늬전갱이(6일)·도미(3일)·단새우 각각 두 점과 소금·와사비를 함께 개인 접시에 담아 나온다. 씻은 묵은지, 명이장아찌, 다시마·표고 육수와 우렁이살을 갈아 넣고 졸인 된장(등 푸른 생선용)을 곁들여 한식 회의 면모를 분명히 했다.

⑤민어전과 섭산삼: 사흘 숙성해 지진 여름 민어전이야 설명이 필요 없다. 섭산삼은 더덕을 두드려 편 다음 찹쌀가루 묻혀 튀기듯 기름에 지진 더덕전병이다. 씹는 즐거움을 위해 찹쌀을 맷돌로 거칠게 갈았다. 함께 나온 꿀에 찍어 먹으면 알갱이가 바삭바삭 씹힌다. 참나물·미나리·영양부추·양파에 고춧가루·식초·설탕 넣고 직접 담근 멸치액젓으로 버무린 샐러드, 장아찌 담갔던 명이나물 간장도 곁들여 낸다.

⑥민물장어 고추장구이: 2~3일 동안 수분을 날리며 저온 숙성한 장어에 고추장 양념을 발라 굽는다. 장어 질감이 발효·숙성에 애착이 많은 요리사 취향을 전해준다. 초간장으로 무친 생 미나리에 장어구이를 올렸다. 식초에 절이고 미림 탄 간장에 재운 생강 채가 함께 나온다.

⑦이베리코 베요타 목살구이: 기름기 적당한 목살을 겉이 바삭하게 구웠다. 맛의 색채가 강한 갈치속젓 쌈장, 명이나물 장아찌, 제피열매 장아찌를 곁들여 차별화된 맛의 변주를 연출한다.

⑧표고솥밥과 섭국에 5찬 밥상: 저온 숙성한 도미 서덜 육수로 표고와 참기름을 넣고 지은 밥에 찐 전복 한 마리를 먹기 좋게 저며 올렸다. 매운 고추를 다져 넣은 자연산 섭국은 시원하고 칼칼하다. 반찬은 육포를 갈아 넣고 볶은 약포고추장, 지난해 김장 때 담근 묵은지, 표고와 소고기양지 장조림, 명란젓, 낙지젓갈 무침이 나온다.

⑨셔벗: 신맛이 좀 빠지도록 여러 날 숙성한 영동 후무사 자두를 오븐에 구워 씨를 빼고 갈아 꿀만 섞어 얼린 디저트.

잣 알갱이를 손에 쥐고 강판에 갈아 월과채 고명을 올리는 조성주 셰프. [사진 이택희]

잣 알갱이를 손에 쥐고 강판에 갈아 월과채 고명을 올리는 조성주 셰프. [사진 이택희]

먹다 보면 음식마다 그의 집요와 섬세가 구비구비 느껴진다. 9월부터는 새로 꾸린 가을 메뉴를 낸다. 여름음식 콩국과 월과채가 퇴장하고 타락죽과 태안 꽃게살 채소 볶음에 전병을 곁들인 찜을 낸다. 민어전은 대하전으로, 열무 보리밥은 지리산 참싸리버섯·꾀꼬리버섯을 생 참기름으로 조리한 자연버섯 무침으로 바꾼다. 장어구이는 남해 전어구이로, 이베리코 구이는 능이버섯 채끝등심찜으로 교체했다.

그의 시즌1은 2014년 6월 홍대 앞에 연 ‘한식주점 얼쑤’였다. 시즌2는 2019년 11월 시작한 압구정동 로데오 시대다. ‘백곰막걸리’의 요리담당 대표로 이승훈 경영대표와 3년 7개월 동안 2인3각 운영을 하면서 한 건물에서 ‘얼쑤 비스트로’를 겸업했다. 이때 두 사람이 중앙일보 디지털판 유료 코너에 지역·계절 음식과 우리 술의 페어링을 소개하는 기사를 연재했다.

조 셰프의 요리 공부 이력은 특이하다. 음식점을 하면서 배움을 병행했다. 고은정 선생의 우리장아카데미와 궁중음식연구원에서 배우고, 젊은 한식 요리사들과 매월 공부 모임을 하면서 2017년부터는 ‘전래음식연구회’의 이말순 고문을 6년 넘게 사사하고 있다. 강인희 교수 책을 애타게 찾은 이유는 이 고문이 강 교수 계승자이기 때문이다. 내밀한 선생님이 따로 있다. 외아들인 그가 형처럼 기대는 선배가 술을 함께 배우면서 알게 된 ‘온지음’ 박성배(42) 셰프다.

코스를 7가지로 줄이고 가격을 5만9000원으로 낮춘 차림도 있다. 3개 룸과 바 테이블 6석 포함 총 22석을 예약제로 운영하며, 술 주문은 선택사항이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hahnon2@naver.com 전 중앙일보 기자. 늘 열심히 먹고 마시고 여행한다. 한국 음식문화 동향 관찰이 관심사다. 2018년 신문사 퇴직 후 한동안 자유인으로 지내다가 현재는 경희대 특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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