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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 희귀병 진단 후 입 닫은 아이, 찾아가는 심리치료에 마음 열었다

중앙일보

입력

민모(8)양 가족에 시련이 닥친 건 2년 전이다. 민 양 부친이 갑자기 희귀병 진단을 받고 중환자실로 들어가면서다. 민 양의 일상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불안과 충격을 이기지 못했다. 입을 닫고 세상과의 소통을 끊었다. 나이에 맞지 않는 퇴행 행동까지 보였다. 담임 교사가 민 양을 도와줄 방법을 궁리했고 지난해 5월부터 심리치료사와 극복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지난 겨울 병마를 이기지 못한 아빠가 결국 세상을 떠났지만, 치료사와의 여정을 이어가며 버텨내고 있다. 아빠를 잘 애도하고 아빠의 빈자리를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있다. 민 양과 함께한 김문정 치료사는 “어렵게 치료를 해 가던 와중에 생각보다 빨리 아버지가 돌아가셔 또다시 위기가 왔지만, 치료를 계속 해나가면서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김 치료사는 2019년부터 시작된 초록우산의 ‘찾아가는 심리치료지원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민 양처럼 도움이 필요한 아동을 1년에 4, 5명씩 20명 안팎 만났다. 이 사업은 심리·정서·행동 문제가 있지만, 경제적 어려움이나 보호자의 인식 부족, 거부 등의 이유로 치료 기회를 갖지 못하는 아동을 위해 심리치료 전문가가 학교나 아이존(아동청소년정신건강지원시설)을 찾아가 심리치료(심리평가, 개별치료, 그룹치료 등) 하는 것이다. 올해는 서울 41개 학교와 11개 지역사회기관(지역아동센터, 교육복지센터, 드림스타트 등)을 찾아 243명의 초중고생을 돕는다. 치료사 60명이 투입된다.

7일 사회복지의 날을 맞아 여러 아동을 어둠에서 끌어올리는 치료사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김문정 치료사는 “아이의 행동이 어떻든 아이는 아이”라며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 치료사는 “나 같아도 어떻게 살까 싶은 사연의 아동을 종종 본다”라며 “일주일에 한 번 만날 때마다 ‘저 아직 살아있어요’라며 생존 신고하는 아이들도 있다. 고학년은 사춘기와 맞물려 더 힘든 시기를 겪어 누군가 도움주는 이가 필요하다“고 했다.

한 아동이 찾아가는 심리치료지원사업 치료사를 만나 미술치료하고 있다. 사진 초록우산 제공

한 아동이 찾아가는 심리치료지원사업 치료사를 만나 미술치료하고 있다. 사진 초록우산 제공

10세 한 아동은 가상 세계에 살고 있는 마냥 현실에 적응하지 못했다. 친구들에게는 늘 공격적이었다. 이 사업을 통해 이선미 치료사를 만났고 2년간 심리치료했더니, 거친 모습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선생님, 마음이 편해졌어요.” 어느 날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이선미 치료사는 “아이들이 심리적인 불편함을 어딘가에서 해소할 수만 있어도 자살, 자해 관련 위기를 막을 수 있다”라고 했다. 폭력 가정에서 자란 현민(가명)이는 아빠를 향한 분노와 스스로에 대한 무기력함에 못 이겨 수시로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미술치료를 받으며 상처를 풀어내는 방법을 알게 됐고 어느새 마음 속 응어리를 털어낼 수 있게 됐다.

이향옥 초록우산 서울1지역본부 복지사업팀장은 “참여 아동의 절반 이상은 경제적 어려움과 부모님 인식 부족 등으로 기관에 찾아갈 여건이 안 돼 치료를 못 받는 사각지대 아동”이라며 “거창한 치료가 아니라 주변에 어른의 손길이 있다는 걸 알기만 해도 큰 도움이 된다. 최근 문제가 되는 극단선택 등도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 사업에 참여했던 박선영 동작 아이존 정신건강전문요원은 “심리적 상처는 신체적 외상을 입은 것과 달리 쉽게 발견되지 않고 주변의 민감한 관심 없이는 적절한 개입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사각지대의 아동의 경우 심리적 취약성이 크지만 보호자와 동반해 심리 치료 기관에 방문하기는 더 어렵다. 찾아가는 심리치료사업은 그런 제약의 아동에게 학교 담당자, 사업 담당자, 주치료자가 한 팀이 되어 긴밀하게 위기 아동을 발굴하고 치료적 개입을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

찾아가는 심리치료지원사업에 참여하는 아동들이 그룹치료를 하고 있다. 사진 초록우산 제공

찾아가는 심리치료지원사업에 참여하는 아동들이 그룹치료를 하고 있다. 사진 초록우산 제공

강훈희 치료사는 “정부 지원은 있지만, 대부분은 관련 기관에 비용을 지원, 운영하는 방식”이라며 “이 사업은 직접 현장의 아이들을 만나 치료를 지원한다. 더 많은 아동이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사업에 2019~2023년 현재 참여 중인 아동은 초1~3년생이 40~50% 수준으로 절반 가까이다. 갈수록 대상이 저연령화된다는 게 초록우산 측 설명이다. 이향옥 팀장은 “어릴 때 빨리 개입하면 잘 치료받고 개선될 수 있다”고 했다.

초록우산의 ‘2023 아동행복지수’에 따르면 아동의 우울, 불안은 최근 3년 연속 나빠졌다. 충동적 자살 생각도 계속 늘고 있다. 그러나 전국 만 11~17세 자녀를 둔 부모 1053명을 대상으로 한 후속 조사에서 69.4%는 ‘내 자녀의 정신건강이 염려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83.6%는 ‘내 자녀의 정신건강은 건강한 편’이라고 응답했다. 초록우산 관계자는 “부모 생각과 자녀 간 정신 건강 사이에 간극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사각지대에 놓인 아동 발굴을 위해 촘촘한 지지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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