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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홍규의 한반도평화워치

새 단계에 진입한 한·일관계, 미래 세대에 짐이 안 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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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미·일 3국 정상이 지난달 18일 캠프 데이비드에서 만났다. 이 회담의 기획자 바이든 대통령은 시대의 변곡점에서 역사적 순간을 만들었다고 공동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70여년 전 각각 맺어진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이 이제 한·미·일 3국 협력체로 새롭게 탄생했음을 환호했다. 귀국 후 조태용 국가안보실장이 회담의 역사적 의미를 “인도-태평양 지역의 지정학을 바꾼 8시간”이라고 표현했듯이 시대의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윤 대통령의 ‘포용적 결단’ 주목
일본의 사죄와 배상 건너뛰어
포용과 승화로 과거 상처 씻길
역사 화해의 ‘신조약’ 추진해야

취임 이후 국제질서가 ‘신냉전’으로 급변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에 호응해야 한다고 판단한 윤석열 대통령은 한·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마침내 일본의 주장을 포용하는 결단을 내렸다. 제3자 변제안이 열어놓은 한·일 관계 개선의 서곡은 짧은 시간 안에 캠프 데이비드 삼중주로 울려 퍼졌다.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협력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달 18일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홈페이지]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달 18일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홈페이지]

외신을 타고 전해진 이 소식에 대해 국내·외의 긍정적 평가가 이어졌다. 선진국에 진입한 한국이 국제질서의 주요 행위자로 부상했음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게다가 징용자 문제로 인해 주객이 전도되어 수세에 몰렸던 한국이 포용적 결단으로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 큰 수확이었다.

이제 차분하게 포용적 결단의 의미와 그것이 남긴 문제를 점검할 시점이다. 분명 그 결단은 가해자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유보한’ 결단이었다. 이는 사죄와 배상이 피해자의 정당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국민 정서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 국민적 저항을 초래하는 정치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점을 역사 화해에 관한 이론으로 설명해보자.

책임론적 화해론은 ‘기억을 통한 사실 확인→사죄·배상·용서라는 책임 실현→정의 회복과 상처 치유→관계 개선’이라는 단계적 프로세스를 상정한다. 즉, 앞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진행하지 못하는 프로세스다.

윤 대통령의 결단은 책임 실현의 단계를 건너뛰고 관계 개선으로 직행한 케이스다. 그 결과 역사 정의를 회복하지 못했고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 제3자 변제 대상자 15명 중 피해당사자 2명을 포함하여 4명이 변제금 수용을 거부했고, 나아가 그들은 변제안을 관철하려는 정부의 공탁 추진에도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법적 소송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계속 공탁을 추진하고, 계류 중인 1000여 명의 소송에 대해서는 확정판결 이후 동일한 조치를 취하며, 소송하지 못한 다수의 징용자에 대해서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징용자 문제를 해소한다는 방침으로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정의 회복도 상처 치유도 보이지 않는다. 포용적 결단 이후 전개된 경로를 돌이킬 수 없다면 사죄와 배상 없는 치유와 정의를 모색해야 한다. 포용론적 화해론이 필요한 이유다.

양국 숙제로 남은 ‘포용론적 화해’

포용론적 화해의 프로세스는 ‘포용적 결단→관계 개선의 돌파구 마련→승화를 통한 치유와 포용의 심판대로 정의 회복→관계의 심화’로 구성된다. 여기서 핵심은 치유에 대한 관점의 전환이다.

책임론적 화해에서는 과거의 사실을 확인하는 기억에서 시작하여 사죄와 반성을 받아냄으로써 치유에 이르게 된다. 이 프로세스에서 소녀상과 징용자상이라는 기억의 심볼이 조형되었다. 소녀상은 원초적 청순성을 징용자상은 참혹한 박탈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와 동시에 상처가 치유되어야 한다는 정언명제를 시각적으로 제시한다. 이어서 가해자의 사죄와 배상이 치유의 필요조건이라는 논리적 추론이 도출된다.

그러나 기억을 통한 치유에서 가해자의 사죄와 배상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때, 기억의 작용은 화해를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처를 덧나게 하고 분노를 증폭하여 마음 깊이 한(恨)으로 새겨진다. 피맺힌 한은 역사적 정의 회복이라는 명분과 결합하여 대의를 위한 투쟁으로 지속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나는 안쓰러움을 느낀다. 이제는 그들의 어깨에 올려진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영혼의 평안을 얻었으면 한다. 승화(昇華)를 통한 치유가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서 상처를 치유하려는 욕구가 충족되기 어렵다면, 그 욕구를 다른 가치 있는 것으로 치환하여 충족시키는 승화를 통해 치유를 달성하는 것이다.

다양한 차원의 가치를 떠올려 볼 수 있다. 피해자 본인이 영혼의 평안을 얻어서 원숙한 인격체로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것, 역사 문제를 둘러싼 국내 갈등이 완화되어 국민 통합을 촉진하는 것, 심화한 우호적 한·일 관계가 국가 간의 갈등 해결의 모델이 되어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것 등이다. 요컨대 승화의 본질은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대물림하지 않고 미래 세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데 있다.

‘포용’은 준엄한 심판을 동반

한편 정의 회복에 대한 관점 또한 바꿀 필요가 있다. 포용은 용서가 아니다. 결코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포용은 준엄한 심판을 동반한다. 과거 집착적 책임 추궁에서 미래지향적 포용의 심판대로 관점을 이동하여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포용적 결단으로 미래를 향한 화해의 로드맵이 만들어졌다면, 여기서 이탈하거나 역행하려는 사고와 행위, 다시 말해 사실을 부정하거나 은폐하여 기억을 방해하는 행위, 약속을 파기하거나 희석하여 포용의 빛이 바래게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보편적 가치와 신의 성실의 원칙에 따라 가차 없이 심판대에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곧 다가올 피해자 없는 시기에 역사 화해를 지속해가는 남은 자들의 몫이다. 일본 내의 정의 의식을 가진 사람들과 연대할 것이며, 나아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세계시민과도 동행할 것이다.

포용적 결단 이후 관계 개선의 진입구에 들어선 지금, 한편으로는 승화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포용의 심판대로 정의를 회복하며 우호적 관계를 튼튼히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일 신조약을 체결하게 된다면 역사 화해는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것이다.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