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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타고 유치원 체험학습? 더 위험해"…노란 버스 아이러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해 5월 4일 오후 대구 달서구 테마파크 이월드 대형버스 주차장에 현장 체험학습을 위해 학생들을 태우고 온 관광버스가 빼곡히 주차돼 있다. 뉴스1

지난해 5월 4일 오후 대구 달서구 테마파크 이월드 대형버스 주차장에 현장 체험학습을 위해 학생들을 태우고 온 관광버스가 빼곡히 주차돼 있다. 뉴스1

“현장체험학습 운행차도 어린이통학버스 신고 대상”이라는 법제처 유권해석 후폭풍이 커지고 있다. 현장체험학습 자체를 취소하는 유치원과 초등학교가 전국에서 속출하고 있고, 대량 계약 해지가 이어지고 있는 버스 업계는 시·도교육청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 중이다.

일선 학교에선 어린이통학버스로 등록된 차를 구하지 못해 예정된 현장체험학습을 줄줄이 취소하고 있다. 현장체험학습에 어린이통학버스로 인정되지 않은 차를 이용하다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교사가 민·형사상 책임을 져야 할 가능성이 있어 아예 현장체험학습을 가지 않기로 결정하면서다.

버스업계 “계약파기 따른 손해금액 150억원”

계약 파기가 이어지자 버스 업계는 손해가 막심한 상황이다. 전국전세버스운송사업조합연합회(이하 연합회)는 연합회 소속 1617개 업체(버스 3만9409대)의 2학기 체험학습 계약 취소 현황을 파악하고 있다. 연합회 관계자는 “지금까지 파악된 취소 건수는 약 900건, 금액은 150억원 정도”라고 말했다. 연합회는 피해 상황 등을 검토한 뒤 전국 시·도교육청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어린이통학버스에 학생들이 탑승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린이통학버스에 학생들이 탑승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린이통학버스 확보가 어려워지자 기차 등 대중교통으로 현장체험학습을 보내는 사례도 등장했다. 경북 포항시 남구 한 유치원에 다섯 살 딸을 보내고 있는 권모(41)씨는 최근 유치원으로부터 “기차를 타고 현장체험학습을 간다”는 알림 문자를 받았다. 오는 8일 대구 동구에 있는 한 아쿠아리움에 현장체험학습을 갈 예정인데 단체로 KTX를 타고 간다는 내용이었다.

권씨는 “유치원 현장체험학습을 기차를 타고 갈 줄은 몰랐다”며 “전세버스보다 기차를 타고 가는 게 더 위험 요소가 많아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유치원 측은 “전세버스 불가 지침과 상관없이 기차를 타는 것 자체가 현장체험학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기차역과 아쿠아리움이 가깝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설명했다.

기차타고 체험학습 가는 유치원…“아이러니”

하지만 이는 법제처가 안전사고를 우려해 현장체험학습에 어린이통학차만 허용한다고 한 유권해석 취지를 무색하게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합회 관계자는 “어린이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일반 전세버스를 타지 못 하게 한 방침이 되레 어린이들을 위험에 노출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며 “법제처가 얼마나 즉흥적이고 비현실적인 유권해석을 내렸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했다.

지난해 10월 21일 오후 대구 달서구 테마파크 이월드 주차장에 단체 관광객을 태우고 온 관광버스가 빼곡히 주차돼 있다. 뉴스1

지난해 10월 21일 오후 대구 달서구 테마파크 이월드 주차장에 단체 관광객을 태우고 온 관광버스가 빼곡히 주차돼 있다. 뉴스1

교사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초등교사노조 정수경 위원장은 “사고 발생 시 학교와 교사의 법적 책임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계도기간이라 봐 줄 테니 현장체험학습을 다녀오라는 것은 교사에게 불법 행위를 강요하는 것”이라며 “교육부는 단속 유예를 요청할 것이 아니라 학생 안전 요건을 갖추지 못한 현장체험학습을 중지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임호근 경북전세버스운송사업조합 전무는 “현재 적용된 지침은 너무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버스 업계와 일선 학교는 물론 학생과 학부모까지 피해를 본다”며 “기존처럼 현장체험학습 차에 일반 전세버스를 허용하되 안전 도우미 동승, 제한 속도 강화, 자동차 외부에 어린이 탑승 표시 등 안전 기준을 강화하는 방안이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경찰청이 지난달 24일 각 지방경찰청 등에 송부한 공문. 현장체험학습에 어린이통학차량이 아닌 일반 전세버스를 이용하더라도 단속보다는 홍보·계도를 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 전국전세버스운송사업조합연합회

경찰청이 지난달 24일 각 지방경찰청 등에 송부한 공문. 현장체험학습에 어린이통학차량이 아닌 일반 전세버스를 이용하더라도 단속보다는 홍보·계도를 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 전국전세버스운송사업조합연합회

교육현장이 겪고 있는 혼란의 발단은 지난해 법제처가 낸 유권해석이다. 법제처는 지난해 10월 ‘교육과정 목적으로 진행하는 비상시적인 현장체험학습을 위한 어린이 이동’에 이용되는 것(교통수단)은 도로교통법 제2조 제23호에 따른 ‘어린이 통학 등’ 규정을 적용받는다고 해석했다.

‘현장체험학습에 전세버스 가능’ 개정안 발의

법제처 유권해석에 따른 가장 큰 변화는 전세버스를 어린이 통학버스로 신고할 때 성인 승객을 태울 수 없다는 점이다. 그동안 초등학교에서 수학여행 등 현장체험학습을 할 때 일반 전세버스를 임대해도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어린이 통학버스’만 현장체험학습에 써야 한다면 해당 버스는 관할 경찰서에 어린이 통학버스로 신고한 후 어린이만 태워야 한다.

이와 함께 지침에 따라 ▶차 전체를 노란색으로 도색해야 하고 ▶‘어린이 탑승’ 안내 표지 설치 ▶어린이 체형에 맞게 조절할 수 있는 안전띠 설치 ▶개방 가능한 창문 설치 ▶정차 또는 어린이 승하차 여부를 알리는 황색·적색 표시등 설치 ▶운전자 안전교육 이수 등 절차가 필요하다. 버스 시설을 개조하는 데 대당 500만~600만원이 든다.

이와 관련, 비상시적 현장체험학습 차는 어린이 통학버스 이용 대상에 포함하지 않는 내용의 법률 개정안이 최근 발의됐다. 대표 발의한 김교흥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어린이통학버스 신고의무 대상에 일시적인 현장체험학습 차는 제외해 지금처럼 수학여행에 전세버스를 임대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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