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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덕수궁 돌담길'…문화재청 규제에 서울시 또 부딪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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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서울시는 세종대로와 맞닿은 덕수궁 돌담길 보도를 넓히고 녹지를 조성하는 방안을 문화재청에 제안했다. 문희철 기자

서울시는 세종대로와 맞닿은 덕수궁 돌담길 보도를 넓히고 녹지를 조성하는 방안을 문화재청에 제안했다. 문희철 기자

서울시는 최근 덕수궁 담장 개방을 추진했다. 세종대로와 맞닿은 덕수궁 돌담길을 허물어 보도를 넓히고 녹지 공간을 확보하자는 차원이었다. 덕수궁 경내와 경계를 없애 많은 시민에게 문화재 관람기회를 주자는 생각도 했다.

담장의 역사적 가치가 별로 없다는 점도 고려했다. 덕수궁 담장은 1961년 군사정부가 허물었다. 이후 철책을 세웠다가 여론이 악화하자 1968년 다시 담을 쌓았다. 서울시 측은 “문화재 가치가 불분명한 돌담을 허물고 광화문광장 등과 연계하면 서울을 대표하는 대규모 도심 공원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서울시 구상은 문화재청으로부터 거절당했다. 윤관영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사무관은 “덕수궁 담장이 원형 그대로 보존된 상태는 아니지만, 궁궐을 유지하는 기능이 있다”며 “덕수궁 담장 철거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도시계획체계와 갈등하는 문화재 보호체계

서울시는 창경궁과 종묘를 단절시켰던 율곡로를 지하화하고 그 위에 녹지(약 8000㎡)를 만들어 끊어졌던 녹지축을 연결했다. [사진 서울시]

서울시는 창경궁과 종묘를 단절시켰던 율곡로를 지하화하고 그 위에 녹지(약 8000㎡)를 만들어 끊어졌던 녹지축을 연결했다. [사진 서울시]

서울시 행정이 문화재 정책과 자주 충돌하고 있다. 서울시는 “문화재 관련 정책이 서울시민을 불편하게 할 때가 많다”라며 “폐쇄적인 문화재 정책 방향을 전향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문화재청은 기본적으로 문화재 원형 유지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한국 문화재 정책이 외국과 비교해도 폐쇄적이라는 게 서울시 주장이다. 서울시는 “한국 주요 궁궐은 유지·관리만 목적이라 내부 행사가 드물 정도로 ‘성역’처럼 관리한다. 반면 영국 런던 버킹엄궁정이나 이탈리아 두오모성당 등 해외 문화재는 시민을 위한 각종 행사가 상시 열리는 등 현대인 삶과 함께한다”고 했다.

창경궁~종묘 연결 복원 사업. 그래픽=김경진 기자

창경궁~종묘 연결 복원 사업. 그래픽=김경진 기자

서울시가 지난해 7월 마무리한 ‘창경궁~종묘 연결 복원 사업’이 대표적 사례다. 서울시는 창덕궁·창경궁·종묘 등 문화재를 보다 많은 시민이 이용할 수 있도록 율곡로를 지하화하고 녹지로 조성했다.

하지만 문화재청이 제한적으로 종묘 관람을 허용하자 서울시는 불만을 터트렸다. 서울시 관계자는 “서울시가 1008억원을 투입해 종묘 접근성을 좋게 했는데, 문화재청이 여전히 관람을 제한해 복원 사업 취지가 퇴색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문화재청은 토요일·일요일·공휴일과 문화가 있는 날(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만 종묘 관람을 허용했다. 관람자가 많으면 문화재 훼손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종묘 정전은 보수공사로 지난해 12월부터 2024년 하반기까지 관람이 아예 불가능하다.


“시민과 단절한 문화재, 정책 방향 수정해야”

오세훈 서울시장이 서울 중구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세운 5구역을 둘러보고 있다.  [뉴스1]

오세훈 서울시장이 서울 중구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세운 5구역을 둘러보고 있다. [뉴스1]

문화재 관련 규제로 개발이 멈춰버린 경우도 있다. 도심 슬럼가로 전락한 세운상가 일대가 대표적이다.

엄밀히 따지면 세운지구는 문화재 보호지역도 아니다. 사적 125호인 종묘에서 남쪽으로 140~170m 거리에 있는 세운지구는 문화재 규제 지역(100m 이내) 밖이다. 문화재청은 2010년 ‘국가지정문화재 주변 현상변경 허용기준’을 만들어 세운지구 재개발 시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받게 했다.

이후 문화재위원회는 세운4지구 심의를 2018년까지 9년 동안 진행했다. 해당 기간 공사는 전면 중단했고, 사업 시행사인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는 이 기간에 날마다 2300만원을 날렸다. 36층(122.3m)으로 계획했던 건물 높이도 11~20층(52.6~71.9m)으로 낮췄다.

이에 대해 정지원 문화재청 세계유산정책과 주무관은 “문화재위원회가 심의한 건물 높이가 자료에 나온 것과 실제 측량치가 달라 수정 보완을 거치면서 오래 걸렸다”며 “건물 배치 계획이나 설계 등 다양한 부분을 검토할 필요성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종묘와 세운지구 사이의 이격거리. [사진 서울시]

종묘와 세운지구 사이의 이격거리. [사진 서울시]

오랫동안 개발이 멈춰선 결과 도심은 슬럼화했다. 최봉문 목원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문화재 보호를 위한 규제와 도시계획체계가 일치하지 않아 생긴 일”이라며 “높이를 중심으로 한 문화재위원회의 일률적·단편적 규제는 매번 허용기준이 달라지면서 합리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는다”고 지적했다.

문화재위원회에 제동 걸린 사업은 또 있다. 서울시는 올해 초 시청 본관 앞 서울광장에 소나무 숲(748㎡)을 만들려고 했다. 그늘을 만들어 시민 휴식공간으로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서울시가 상반기중 소나무숲으로 조성하고자 했던 공간. 현재는 펜스로 막혀있다. 서울시는 하반기 이 곳을 소나무숲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문희철 기자

서울시가 상반기중 소나무숲으로 조성하고자 했던 공간. 현재는 펜스로 막혀있다. 서울시는 하반기 이 곳을 소나무숲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문희철 기자

이 사업은 올해 상반기 마무리할 예정이었지만, 아직 첫 삽을 못 떴다. 문화재청 조사 과정에서 석축·우물 등 유구(遺構·토목건축 양식을 알 수 있는 자취)가 나왔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학술자문·현장조사 등을 거쳐 ‘기록 보존’으로 결론 내렸다. 기록 보존은 문화재가 묻혀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계획대로 공사를 시행해도 된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러는 사이에 무더운 여름철은 다 지났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르면 오는 10월 초 공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밖에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이 낙후한 상황도 문화재 규제와 관련 있다. 국보 1호 숭례문 외곽 경계에서 100m까지는 ‘숭례문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이다. 보존지역은 최대 3층 안팎(11~15m)까지 건물을 올릴 수 있다.

日, 관련 권한 지자체로 이양

마천루로 둘러쌓인 도쿄역 인근 고층건물의 용적률과 높이. 그래픽=차준홍 기자

마천루로 둘러쌓인 도쿄역 인근 고층건물의 용적률과 높이. 그래픽=차준홍 기자

지나친 문화재 규제는 도심 개발을 저해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 견해다. 도심을 정비하거나 녹지를 조성하려면 고층 빌딩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사업시행자가 세입자·토지주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상가를 매입해야 공원 등으로 조성할 땅을 기부채납할 수 있어서다. 그런데 문화재위원회 높이 규제를 적용하면 초고층·초고밀도 개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한다.

반면 문화재청은 인근 지역 개발은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문화재는 한 번 훼손되면 다시 복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사적과 궁궐, 왕릉과 같은 문화재는 인근 지역이 한 번 개발되면 사실상 다시 경관을 확보하기 어렵다.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관계자는 “종묘 앞에 높이 200m의 초고층 건물이 들어서면, 종묘 정전 앞 상월대에서 남쪽을 바라볼 때 건축물 상단 120m 정도가 시야에 들어온다”며 “이처럼 건물이 종묘 경관을 해치면 영국 리버풀처럼 종묘도 세계유산 등재가 취소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재민 대전세종연구원 문화정책 연구 담당 연구위원은 “갈수록 지방자치단체에서 개발 계획을 많이 내놓고 있는데, 이런 요구를 모두 허용하면 도시 정체성이 사라지는 문제가 생긴다”며 “과거부터 전승해온 자원을 보존해야 시민 개개인의 자긍심도 고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도쿄의 대표적인 관광상품이 된 도쿄역의 야경. 도쿄역 뒤로 고층 건물이 보인다. 서승욱 기자

도쿄의 대표적인 관광상품이 된 도쿄역의 야경. 도쿄역 뒤로 고층 건물이 보인다. 서승욱 기자

이웃 나라 일본은 이와 다르다. 37~42층 마천루로 둘러싸인 일본 도쿄 도심은 원래 서울과 비슷했다. 도심 한복판에 문화재인 도쿄역이 자리 잡고 있어서다. 국가중요문화재가 있으면 인근에 이보다 높은 건물을 올릴 수 없다고 규정한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도쿄역 인근에 31m(일반 건물 6층 높이) 이상 지을 수 없었다.

하지만 2002년 도시재생특별조치법을 도입하면서 고도 제한을 풀고 용적률 등 규제를 완화했다. 특별법이 문화재보호법과 충돌하자 일본은 문화청 장관이 보유했던 문화재 현상 변경 권한을 광역지자체(도도부현)로 넘겼다. 그랜드도쿄북부타워(205m·43층)·신마루노우치(197m·38층) 등 고층 빌딩이 줄줄이 도쿄 도심에 들어선 배경이다.

영국의 경우 역사 보존 정책을 도시 개발 계획과 통합한 ‘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한다. 역사를 보존하자는 주장과 인근을 개발하자는 주장을 하나의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다. 예컨대 런던시의 ‘시티 오브 런던 보존구역’이 대표적이다. 서울시 문화재정책과는 “역사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는 장소를 시티 오브 런던 보존구역으로 지정하지만, 전면적으로 개발을 제한하기보다는 해당 지역의 경제적 가치와 주거 수요 등을 반영해 도심 쇠퇴를 방지한다”고 설명했다.

권대중 서강대 부동산학과 교수(한국부동산융복합학회장)는 “문화재보호법 제44조 4항은 건설공사 과정에서 문화재를 발굴할 경우 시행자가 발굴 경비를 부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라며 “오직 보존 논리만 적용하면 도심 슬럼화로 더 큰 도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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