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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현재가 과거와 싸우도록 내버려두면 잃는 것은 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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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혐오하는 민주주의』 출간 정치학자 박상훈의 고언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대통령은 어떤 자리이고 무엇을 목표로 나아가야 하나. 윤석열 대통령은 연일 강한 어조로 자유와 이념을 강조한다. 여소야대 국회와 “전부 야당 지지세력들이 잡고 있는” 언론을 싸잡아 비판하고 “1+1을 100이라고 하는 세력”과 싸운다. 정국은 꽉 막혔다. 답답한 마음에 지난 1일 세종시에 있는 대통령기록전시관을 찾았다. 전시관 앞에 2016년 경기도 성남시에 있던 대통령기록관을 세종시로 옮겨 개관한 것을 기념해 ‘대통령기록관’이라고 적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 표지석이 보였다.

기록관 1층 ‘대통령의 상징’ 전시에는 역대 대통령의 취임사에 쓰인 문장으로 대통령의 얼굴을 형상화한 텍스트 아트 조형물이 있었다. 기록관 안내문은 “대통령의 취임사는 새 정부의 국정철학과 비전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국정운영의 청사진이자,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대통령이 국민에게 전하는 핵심가치가 그대로 담겨져 있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은 야당과 대화 의지 부족
여당, 독재 때보다도 목소리 못내

적대적 팬덤정치 여야 모두 문제
진보·보수 통합형 리더십 힘 잃어

좋은 대통령보다 좋은 정당 중요
역사는 정치동원의 수단 아니다

하지만 취임사 그대로만 하면 모두 성공한 대통령이 됐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만큼 취임사를 지키기 힘들다는 뜻이다. “오늘부터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 한분 한분도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문재인 전 대통령의 인상적인 취임사는 처음에 찬사를 받았지만 현실은 거꾸로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취임사 키워드로 이념과 자유민주주의, 책임정치, 복지국가 등이 나열된 점이 눈에 띄었다. 2층엔 대통령들이 받은 선물을, 3층엔 대통령의 접견실과 집무실을 재현해놓았다.

DJ의 붓글씨 ‘눈 덮인 들판 걸어갈 때’

세종시 대통령기록전시관 1층 의 상징 전시물. 역대 대통령의 취임사에 쓰인 문장으로 대통령의 얼굴을 형상화했다. 서경호 기자

세종시 대통령기록전시관 1층 의 상징 전시물. 역대 대통령의 취임사에 쓰인 문장으로 대통령의 얼굴을 형상화했다. 서경호 기자

4층은 대통령의 지위와 역할을 보여주는 공간인데 대통령의 휘호를 볼 수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호쾌한 붓글씨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이 있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발걸음 어지럽게 가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가는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는 뜻이다. DJ가 애송했던 서산대사의 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2013년 신년 휘호 ‘水到船浮(수도선부·물이 불어나면 큰 배가 저절로 떠오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2000년 신년사 1차 수정본이 눈길을 끌었다. 친필로 빼곡하게 수정한 내용이 그대로 담겨있다.

대통령기록관을 둘러봤지만 요즘 정치에 대한 답답함은 풀리지 않았다. 마침 지난달 말 출간된 정치학자 박상훈(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의 신간 『혐오하는 민주주의』를 읽고 일말의 실마리-정치를 잘해야 한다-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원로 정치학자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제자로, 『정치의 발견』 『정당의 발견』 『민주주의의 시간』 등의 저서를 내며 민주정치에 관해 꾸준히 강의하고 글을 써왔다. 특히 문재인 정부 출범 1년을 지켜보고 2018년 5월 출간한 『청와대 정부』에서 “청와대가 대통령제를 유사 군주정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며 “제어되지 않은 ‘강한 청와대’는 ‘민주적 책임정부’와 양립할 수 없는 형용모순”이라고 비판해 화제가 됐다.

“우리 정치, 한동안 좋아지기 어렵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오래 걸리지만 오래가는 변화를 지향하는 체제가 민주주의”라고 강조했다. 임현동 기자

정치학자 박상훈은 “오래 걸리지만 오래가는 변화를 지향하는 체제가 민주주의”라고 강조했다. 임현동 기자

박상훈은 새 책에서 “우리 정치가 좋아질 수 있을까”라는 자문에 “한동안은 어렵다”고 자답했다. 가장 큰 이유로 정치 경험이 없는 대통령을 거론했다. “야당을 존중하고 함께 일을 풀어가는 정치지도자의 역할을 할 생각도 없다”고 썼다. 여당은 있을지 몰라도 집권당, 즉 정부를 책임지는 정당이 없다는 지적도 했다. 그에게 책 얘기를 더 들어봤다.

“여당이 정부를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정국을 주도하는 것도 아닌 시대”라고 썼다.
“군부 권위주의 시절보다 지금의 집권 여당이 훨씬 더 제 목소리를 못 낸다. 용산의 여의도출장소 같다. 박정희 시절의 공화당, 전두환 시절의 민정당보다 지금의 국민의힘이 더 권위를 갖는다고 볼 수 없다. 박정희도 3선 개헌을 하기 위해 조카사위(김종필)를 내쳐야 할 정도로 공화당의 결기를 꺾는 데 애를 먹었다. 민정당 남재희 정책위의장도 청와대 수석들에게 할 말 다했다.”

“과거와 씨름하면 좋은 변화 못 만들어”

대통령과 집권당 모두 한국 정치의 과거에 의존해 생존하고 있다고 비판했던데.
“과거 대통령과 과거 집권당의 실패 덕분에 우연히 집권하게 되었을 뿐, 자신들만의 계획과 청사진을 보여준 적이 없다. 앞으로도 과거를 불러내고 과거와 싸워서 생존하게 될 텐데, 오래전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이 말했듯, ‘현재가 과거와 싸우도록 내버려두면 잃는 것은 미래’다. 과거와 씨름하는 정치가 좋은 변화를 만들 수는 없다.”
팬덤 정치가 왜 문제인가.
“팬덤 민주주의는 혐오로 작동하는 민주주의다. 서로 대화하고 협력할 수 없는 민주주의, 개인과 집단의 다양한 선호로 움직이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것을 혐오하는 민주주의가 됐다. 팬덤 정치는 정당정치나 의회정치가 기반을 두고 있는 다원적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민주주의 내부에 도사린 적

그래서 ‘민주주의의 적은 민주주의’라는 건가.
“군부 쿠데타나 공산혁명의 도전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현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건 비민주적 이념이나 대안이 아니라 자기 자신, 즉 민주주의가 됐다(윤 대통령은 공산전체주의를 위협세력으로 지목한 바 있다).”
팬덤정치가 ‘개딸’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는데.
“여야를 가로지르는 한국 정치 일반의 문제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시기엔 대통령과 집권당 사이에 상호 자율성을 전제로 하는 ‘당정 분리 원칙’이 그래도 작동했다. ‘상도동계’ ‘동교동계’ ‘친노’ 등 대통령 파벌은 반대 파벌과 여론의 경계 대상이었다. 박근혜·문재인 때는 달랐다. ‘친박’과 ‘친문’은 ‘청와대 관심 사안’ ‘대통령 공약 사안’을 내세우며 당정은 물론 의회정치 전반을 좌우했다. 여당 안의 신진 개혁세력이 사라졌다. 노무현 정부 때의 ‘천·신·정(천정배, 신기남, 정동영)’, 이명박 정부 때의 ‘남·원·정(남경필, 원희룡, 정병국)’ 현상은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팬덤 정치로 새로운 유형의 정치인이 나왔다고 썼다.
“정치 양극화와 팬덤 정치로 온건 다당제나 합의 민주주의처럼 갈등을 절약해 협력의 기반을 키울 수 있는 정치의 길이 폐쇄됐다. 이 과정에서 대중의 의지와 열정을 동원해 기회를 잡으려는 ‘야심가형’ 인물형이 등장했다. 이들은 호감, 좋은 평가, 인격적 훌륭함이 아니더라도 정치적으로 주목받고 승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양극화된 두 진영에서 어느 한쪽만 자기편으로 만들면 되는 새로운 정치 문법이 만들어졌다. 반면,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통합형 리더십은 성공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문재인 정부, 야당과 정치연합 했어야

문재인 정부의 ‘촛불 혁명’을 비판했다.
“촛불 집회는 진보만이 아니라 중도는 물론 보수 시민의 상당수가 참여하고 지지했던 ‘사회적 대연정’이었다. 이를 존중해 문재인 정부는 광범한 정치 연합으로 공동통치를 제도화했어야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야당을 국정운영의 동반자로 삼겠다고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촛불 ‘합의’가 촛불 ‘혁명’이 돼버렸다.”
지금 정부도 ‘청와대 정부’인가. 세간에선 여전히 ‘용와대’ ‘YH(용산+BH)’라고 부른다.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나를 따르라’식이 아닌가. 대통령의 정치는 야당과 하는 거다. ‘용와대 정부’가 아니라면 야당과 대화해야 한다. 야당을 ‘미래정부’가 될 수 있는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 야당도 시민이 뽑아 5년의 주도권을 넘겨준 행정부의 수장을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보면 거울 같다. 여야가 적대적 공생관계다.”
윤 대통령이 요즘 역사와 이념을 자주 강조한다.
“그게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동원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건 조심해야 한다. 박근혜 때의 국정교과서나 문재인 때의 건국절 논쟁처럼 반드시 무리가 따른다.”
『혐오하는 민주주의』

『혐오하는 민주주의』

팬덤 민주주의의 상대편에 박상훈이 지향하는 ‘다원 민주주의’가 있다. 다원 민주주의는 야당이 있는 민주주의다. 그에 따르면 다름과 차이 속에서 숙려하고 조정하고 합의해 ‘오래 걸리지만 오래가는 변화’를 지향하는 체제가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왕을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이익과 열정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집약하는 정치의 체계가 작동하는 것이며 이를 주도하는 것이 정당‘들’이다.” 그래서 좋은 대통령보다 좋은 정당이 중요하다고 했다. “사납고 공격적인 팬덤을 가져야 대통령이 되고 당 대표가 되고 당 최고위원이 되는 민주주의는 결국 민주주의가 아니다.” 4년쯤 지나면 대통령기록관에 지금 대통령의 자리도 마련될 터이다. 과연 어떤 성과를 남긴 대통령으로 기록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