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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채병건의 시선

‘천년 숙적’의 숨은 친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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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디렉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디렉터

지난달 25일 유엔 안보리 회의는 무엇이 ‘악랄한 범죄’인지 되새겨보는 계기였다. 북한이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해 정찰위성을 발사한 걸 논의하기 위해 모였는데 북한 측이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끌고 나와 “인류와 환경에 대한 악랄한 범죄”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방사능 노출로 일본을 비난한 북한은 그간 핵무기를 보유하겠다며 핵실험을 해서 여섯 차례나 한반도 지하에 무기급 핵물질을 방출했다. 이젠 남한과 주변국을 핵 공격하겠다며 미사일을 개량 중이다. 북한은 지난 2일에도 순항미사일을 쐈는데 목표 지점 150m 상공에서 탄두를 터트리는 전술핵 시험 발사였다.

6·25 남침에 패전국 일본 부흥
반일 앞세운 북한, 결과는 친일
핵 개발로 군비 증강 명분 제공

일본을 상대로 가장 반일을 외치는 건 북한이다. “일본은 천년 숙적”이라는 말도 만들어 냈다. 하지만 북한이 흔든 반일의 깃발과 그에 따른 결과가 일치한 건 아니다.

지금은 일본 총리가 캠프 데이비드에서 미국 대통령과 화사하게 웃는 관계이지만 70여 년 전엔 상상할 수 없었다. 미국이 원폭 2발을 떨어뜨려 잿더미로 만들었던 관계였다. 태평양전쟁 패전국 일본에 재건의 기회를 준 건 북한이었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일본은 전쟁 특수라는 일대 전기를 맞았다. 경영난으로 파산 직전이던 도요타가 북한의 남침으로 기사회생했던 건 유명한 일화다. 개전 후 몇 달간 미군이 도요타에 주문한 군용트럭만 5000여대였다. 도요타만 아니었다. 당시 로버트 머피 주일대사는 “한국전쟁은 일본 열도를 거대한 보급창고로 만들었다”고 묘사했다.

당시 일본은 미군 병력이 후방 집결하는 배후지로도 역할을 했다. 한반도 유사시 유엔군 병력이 집결하고 보급을 받는 ‘후방기지’로서의 일본의 역할은 지금도 동일하다.

일본에 경제적 부흥만 아니라 보통국가화 명분을 준 것도 북한이다. 일본은 2차대전의 전범국이다. 그래서 패전 후 만들어진 평화 헌법에 근거한 전수방위(공격을 받을 때만 방위력을 행사한다) 원칙을 유지해 왔다. 자위대를 확충하고 대외 군사 활동을 확대하려면 국제사회의 동의와 일본 내 반전 여론의 약화가 필요했다. 이때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들고 등장했다. 북한은 1998년 대포동 1호를 시작으로 장거리미사일을 계속 시험 발사하고 있고, 2006년 첫 핵실험에 나선 뒤 이젠 핵탄두를 완성했다.

과거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이 협상용이라는 관측이 상당 기간 있었다. 미국의 시선을 끌고, 대미 협상에 앞서 우월한 지형을 마련하고, 협상에서 북한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관측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기대감은 국제사회에서 더는 찾기 힘들다. 북한의 핵 보유는 수단이 아닌 목표다.

북한 스스로 “절대로 먼저 핵 포기란, 비핵화란 없으며 그를 위한 그 어떤 협상도 그 공정에서 서로 맞바꿀 흥정물도 없다”고 발표했다.(2022년 9월 최고인민회의) 커트 캠벨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인도태평양조정관이 지난달 “북한의 많은 군사 시험은 외교적 목적이라기보다 군사 및 핵 역량을 발전시키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고 말했는데 이게 북한을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일반론이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움켜쥘수록 보통국가화를 지향하는 일본의 목소리도 힘을 얻는다.

현재 한강의 기적을 흔들 가장 즉각적인 요인은 분단 체제다. 구체적으론 북핵이다. 북핵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면 지난 5월 31일 아침 정적을 깬 사이렌을 다시 떠올리면 된다. 북한의 대남 국지 도발에도 남한과 미국이 북한의 후속 핵 도발이 두려워서 갑론을박을 벌이다 마땅한 대응을 하지 못 하는 게 확인되는 순간 한국의 자산시장, 외환시장엔 금이 간다.

한국민은 어쩔 수 없이 이 땅에 살아야 하지만 외국 자본은 그럴 이유가 없다. 지킬 수 없는 자산은 자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국면을 막기 위해 미국과는 끊임없이 동맹 외교를 강화하고 연합훈련을 하고, 일본과는 지소미아(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를 체결하고 통화 스와프도 체결한다.

한·일 관계 개선과 군사협력의 배후는 북한이었다. 지소미아 체결을 친일 외교로 비난하는 이들이 있는데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는 서로 뒤바꾸면 알 수 있다. 북한이 핵미사일을 포기하면 지소미아를 중단할 수 있다. 하지만 지소미아를 중단한다고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지소미아가 친일 외교라면 지소미아를 부른 북한이 친일 강요자다.

북한은 6·25 남침으로 잿더미가 된 일본 경제에 부흥의 기회를 줬다. 이어 핵과 미사일 개발로 일본이 보통국가화로 나설 명분을 줬다. 반일을 외쳤지만 결과적으론 경제와 군사 모두에서 일본을 도왔다. 이쯤 되면 ‘천년 숙적’의 숨은 친구가 북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