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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빚잔치에 마른수건 짜나"…회생기업 덮친 1090억 稅폭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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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안그래도 빚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엎친데 덮친격”
 A 회사는 B 구청을 상대로 지난 6월 조세 불복 심판을 제기했다. 2018년 법원으로부터 회생 기업 인가 결정을 받을 당시 등록면허세(이하 등록세)를 냈어야 했는데 이를 납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연이자까지 더해 수억 원대의 세금 폭탄을 뒤늦게 맞았기 때문이다. A 회사 측은 “회생 기업 인가 결정을 받을 때 아무런 고지도 없었는데, 지방자치단체가 느닷없이 5년 만에 세금을 내라고 통보해왔다”며 “마른 수건을 쥐어짜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만희 국민의힘 의원이 3일 행정안전부로부터 제출받은 ‘회생 기업 등록면허세 과세 관련 불복 청구 현황’(2017년~2023년 8월)에 따르면, 서울·경기·경남·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뒤늦게 등록세 과세통보를 받은 회생 기업들이 각 지방자치단체를 상대로 조세 분쟁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1건과 올해 46건, 총 47건의 조세불복심판이 조세심판원에 청구된 상태다.

지자체가 2016년 개정된 지방세법을 근거로 지난해부터 회생 기업에 등록세를 무더기 과세하며 생긴 일이다. 당초 지방세법은 법원으로부터 회생 인가를 받은 기업의 등록세를 비과세하도록 규정했지만 2016년 법 개정을 통해 과세 대상으로 전환했다. 그런데 상당수의 지자체들이 등록세를 걷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지내왔다. 부산시 사하구청이 2022년 이를 ‘숨은 세원’으로 발굴한 게 적극행정 사례로 행정안전부 장관 표창을 받으면서 일이 커졌다. 다른 지자체들이 그제야 추징 행렬에 나선 것이다.   

쌍용차, STX 대기업도 난데없는 세금폭탄 

2022년 6월 28일 서울회생법원 회생1부(서경환 법원장, 이동식 나상훈 부장판사)는 매각공고 전 인수예정자였던 KG 컨소시엄을 최종 인수예정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2022년 6월 28일 서울회생법원 회생1부(서경환 법원장, 이동식 나상훈 부장판사)는 매각공고 전 인수예정자였던 KG 컨소시엄을 최종 인수예정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그러나 지자체가 회생 기업에 아무 고지 없이 6년을 흘려보낸 사이, 지연이자가 더해져 추징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존재도 몰랐던 세금이 잔뜩 체납됐다는 사실을 통보받게 된 기업들은 패닉에 빠졌다. 행안부 자료에 따르면, 전국 각지의 회생 기업에 부과된 등록세 과세규모는 올해 7월 말 기준 1090억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 무려 40%(420억원)가 지연이자다.  

대기업도 세금 폭탄을 피해 가지 못했다. 회생절차가 2019년 2월 종결된 STX중공업, 2022년 11월 종결된 쌍용자동차도 뒤늦은 세금고지서를 받았다. 쌍용자동차 측은 “회계에 반영해두지 않았던 세금을 난데없이 부과받았다”며 “액수가 만만찮아 덩치 작은 기업들 입장에선 더욱 부담일 것”이라고 말했다

지방세법과 채무자회생법 정면 충돌…文정부 나몰라라

서울회생법원

서울회생법원

 이번 사태는 2016년 지방세법 개정이 기존 채무자회생법과 정반대의 내용을 담으면서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지방세법과 달리, 채무자회생법은 회생 기업의 등록세를 비과세 대상으로 규정한다. 막대한 빚을 변제해야 하는 기업을 위해 세 부담이라도 덜어주자는 취지로 반영된 규정이다. 이강민 변호사(법무법인 율촌)는 “기업이 회생절차를 밟게 되면 사실상 회생 법원이 실질적 경영권을 갖고 모든 일을 진두지휘한다”며 “회생 기업의 등기도 법원이 등기소에 직접 위임해 처리하는데, 이 과정에서 법원은 채무자회생법에 따라 등록면허세를 비과세 대상으로 인지하고 절차를 진행해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기업은 자본금 증자 등에 대한 등기 절차를 밟을 때 반드시 구청에서 수령한 등록세 납부 필증을 함께 제출해야 해 납부의무를 모르고 지나칠 수 없다. ‘선(先) 등록세 납부, 후(後) 등기’가 원칙이라 세금 납부를 빠트릴 일이 없다는 얘기다. 반면 회생 기업의 경우 법원 지시에 따라 등기소가 등록세 납부 여부와 상관없이 등기를 내줘, 정작 납세 주체인 기업은 등록세가 발생했단 사실 자체를 모를 수 있다.

 문제는 사법부가 지방세 개정 직후 이런 문제를 제기했음에도, 정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울고등법원은 2017년 지자체의 등록세 처분 취소 소송에서 “행안부가 발행한 지방세법령 적용요령을 보면 최소한 지방세법을 개정할 당시 (등록세 관련) 쟁점을 알고 있었다고 보인다”며 “법률에 상호 모순·충돌이 발생함을 알면서도 소관 부처가 다르다는 이유로 이를 방치하는 것은 입법 주체의 명백히 잘못된 권한 행사”라고 지적했다.

이만희 의원은 “사법부가 진작 지방세법의 모순점을 지적했는데도 문재인 정부는 5년간 안일하게 방치했다”며 “그 결과 회생 기업들에게 부과된 세금이 지금도 불어나고 있고, 관련 행정소송이 전국 각지에서 빗발치는 실정”이라고 강조했다.

뒤늦게 법안 개정 나섰지만, ‘소급’은 안돼  

한덕수 국무총리가 6월 28일 오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4동에 이전한 조세심판원 이전 현판식에 참석한 뒤 기념식수를 하고 있다. 뉴스1

한덕수 국무총리가 6월 28일 오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4동에 이전한 조세심판원 이전 현판식에 참석한 뒤 기념식수를 하고 있다. 뉴스1

회생 기업들의 아우성이 커지자 정부는 뒤늦게 법 개정에 나섰다. 법무부는 행정안전부와 협의를 거쳐 지난 17일 법인 회생 절차에서 등록면허세를 전면 비과세로 전환하는 내용의 지방세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내년 1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그러나 ‘소급 적용’ 조항이 빠져있어, 기존에 과세 처분을 받은 회생 기업들은 꼼짝없이 등록세를 납부해야 할 처지다. 전국 각지로 ‘세금 불복’ 소송이 더욱 번져나갈 가능성도 있다. 이강민 변호사는 “소급적용을 국회 입법 단계에서 추가하지 않는 한, 지자체가 세금을 스스로 철회할 순 없다”며 “다만 정부가 입법예고를 한 만큼, 기업들이 과세 불복 소송에서 더 유리해질 순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등록면허세=재산권에 관한 각종 권리 설정·변경 또는 소멸을 등기·등록하거나 사업 관련 면허 및 인·허가를 받은 사람이 내야 하는 지방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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