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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만들 수 없다면 훔쳐라” 핵 정보 ‘거대한 작전’ 성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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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0호 27면

[제3전선, 정보전쟁] 핵무기 개발 막전막후 〈하〉

모스크바 서남쪽에 위치한 소련 최초의 원폭실험실인 아자마스연구소 (Arzamas-16). 소련 원자폭탄 개발의 상징적 연구소이다. [중앙포토]

모스크바 서남쪽에 위치한 소련 최초의 원폭실험실인 아자마스연구소 (Arzamas-16). 소련 원자폭탄 개발의 상징적 연구소이다. [중앙포토]

1945년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을 완성하고 핵무기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미국의 핵무기 독점은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4년 후인 1949년 소련이 세계 두 번째로 원폭실험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놀랐다. 1950년대 중반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던 소련의 핵무기 개발이 예상보다 빨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의 조기 핵무기 개발 뒤에는 미국이 계산하지 못한 소련의 정보력이 있었다.

소련의 핵무기 정보전도 과학자들의 통찰력으로부터 시작됐다. 핵물리학자 게오르기 플료로프는 소련 원자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고리 쿠르차토프와 함께 1940년부터 핵분열 연구에 몰두했다. 1942년 4월 어느 날 전세계 핵물리학 연구 동향을 살펴보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가 핵물리학 논문 수가 현저하게 줄어든 것을 발견했다. 순간 플료로프는 원폭 핵무기 연구가 비밀리에 진행되면서 관련 연구자료들이 극비로 취급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의 직감은 정확했다. 당시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 과학자들은 나치의 원폭 개발 가능성을 우려해 과학자들에게 연구논문 발표를 자제해 달라고 호소했고, 미국과 영국 당국도 1942년부터 핵관련 연구를 기밀로 분류하여 출판을 통제했다. 플료로프는 바로 스탈린에게 편지를 썼다. 독일·미국·영국이 비밀리에 원폭을 개발하고 있으니 우리도 빨리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 ‘원폭 아버지’ 플료로프의 통찰력

아자마스연구소(Arzamas-16)내 소련 원자폭탄 박물관. [중앙포토]

아자마스연구소(Arzamas-16)내 소련 원자폭탄 박물관. [중앙포토]

기본 동향은 소련 당국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소련은 주로 영국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영국이 미국보다 먼저 핵무기 연구에 나섰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지지자인 물리학자 앨런 메이가 영국의 핵무기 개발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하면서 제공한 정보가 큰 도움이 되었다. 영국을 통해 서방의 핵무기 개발 윤곽을 파악한 소련은 1942년 3월 미국내 전(全) 공작망에 핵무기 개발 정보를 최우선 수집하도록 지시하는 등 정보 수집을 미국으로 확대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은 미국·영국·캐나다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합동으로 핵무기 개발에 나선다는 중요한 정보를 확인했다. 그러나 이를 알고서도 소련은 핵무기 개발에 집중할 수 없었다. 핵무기 개발 기술력이 아직 충분하지 않은 데다,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핵무기 개발에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이에 스탈린은 “만들 수 없다면 훔쳐서라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이때부터 소련 내무인민위원회(NKVD)는 ‘거대한 작전(Operation Enormous)’으로 명명된 비밀 핵 정보전을 가동했다.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전신인 NKVD는 소련의 자체 역량으로는 조기 핵무기 개발이 쉽지 않은 만큼 서방의 핵무기 개발 정보를 빼내 개발 시간을 최대한 단축시킨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서방의 핵 과학자들이 몰려있던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에 정보력을 집중했다. 그 일환으로 소련 군(軍) 정보기관인 GRU 소속의 조지 코발을 맨해튼 프로젝트에 위장 침투시켰다. 소련 태생의 미국인으로 1939년 GRU에서 스파이훈련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온 코발은 맨해튼 프로젝트의 방사선 안전담당 요원으로 침투해 내부동향을 파악했다. 1943년 여름 나치의 공격을 막아낸 소련은 핵무기 개발 여력이 생겼다. 특히 이 무렵 NKVD가 서방의 원폭 관련 극비 문서들을 다량 입수하는 성과도 올렸다. 이 같은 긍정적 움직임으로 인해 ‘거대한 작전’ 팀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에 고무된 스탈린도 1944년 12월 소련 정보기관이 핵무기 개발을 주도하도록 힘을 실어 주었다.

그러나 미국도 독일·일본·소련의 정보전 침투를 막기 위해 2중 3중으로 방첩활동을 강화했다. 이 때문에 소련의 정보활동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즈음 공산주의를 신봉하던 일부 미국 과학자들이 핵개발 정보를 자발적으로 소련에 제공해주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사회의 이념적 혼란기를 맞아 자생적 소련 스파이들이 하나둘씩 생겨났고, 이들이 미국의 핵무기 독점을 반대하며 소련에 핵개발 정보를 넘겼던 것이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소련에게는 한 줄기 빛이었다. ‘거대한 작전’ 팀도 다시 활력을 띠기 시작했다.

소련에 핵개발 정보를 제공한 자발적 스파이, 로젠버그 부부. [중앙포토]

소련에 핵개발 정보를 제공한 자발적 스파이, 로젠버그 부부. [중앙포토]

독일계 영국인으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클라우스 푹스는 대표적인 자발적 소련 스파이였다. 특히 푹스는 영국의 핵개발 사업부터 참여했기 때문에 순도 높은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이에 1945년 1월에는 원폭의 기폭 장치 및 발사 회로와 같이 복제하기 어려운 설계도, 원자폭탄의 조립 순서 등 핵심 정보를 제공했다. 특히 1945년 7월 16일에는 미국의 마지막 핵무기 실험인 시제폭탄 ‘가제트’의 폭발실험에 참여하여 그 결과까지 소련에 넘겼다. 물리학자 시어도어 홀도 자발적 스파이였다. 18세에 하버드대를 졸업한 수재로 졸업 직후 맨해튼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미국의 핵무기 독점에 반감을 가진 홀은 미국이 독자 개발한 플루토늄 폭탄 사업에 참여하면서 플루토늄탄의 내파설계법을 소련에 넘겼다. 홀은 당시 뉴욕에서 암약하던 소련 정보요원 세르게이 쿠르나코프를 접촉해 소련을 위한 자발적 스파이가 되겠다는 의사까지 전달했다. 물리학자 로젠버그 부부도 공산주의 지지자로, 맨해튼프로젝트에서 일하고 있던 친척 데이비드 그린글래스를 통해 원폭 개발정보를 빼내 소련에 넘겨주었다.

이렇게 수집한 정보를 통해 소련은 1949년 8월 29일 드디어 카자흐스탄 사막에서 원폭 실험에 성공했다. 후발주자로서 기적같은 성공이었다. 소련은 미국의 원폭 정보를 확보함으로써 실전 실험에 소요되는 막대한 인력과 예산을 줄일 수 있었다. 영국 브라이언 모이나한 교수의 평가처럼 만약 소련이 정상적인 코스를 밟았다면 조기 핵무기 개발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정상적인 방법 대신 절차와 재원,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정보적 방법을 선택했다. ‘거대한 작전’의 성공은 ‘거대한 정보 작전’의 승리라 할 만했다.

푹스, 로젠버그, 그린글래스 등 미국내 소련 핵스파이들은 영국과 미국이 1949년 7월부터 극비리에 실시한 베노나(VENONA) 암호해독 사업에 의해 체포됐다. 그러나 소련에 가장 많은 정보를 넘긴 푹스를 체포하고도 영국은 재판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극비 사항인 영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과 베노나 사업이 재판 과정에서 노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영국은 푹스에 대해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간첩죄 대신, 일반 형사범인 기밀준수 위반죄를 적용해 14년 형을 선고하고 영국 국적을 박탈했다. 1959년 풀려난 푹스는 동독으로 이주해 칼 마르크스 훈장을 받고 드레스덴대 교수를 지내다 1988년 사망했다.

훔쳐낸 정보로 막대한 인력·예산 절감

초기 핵무기 개발 경쟁은 반전의 거듭이었다. 나치 독일이 우라늄의 핵분열 에너지를 최초로 발견하여 원폭 개발의 선두에 섰으나, 미국과 영국의 견제에 막혀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했다. 반면, 소련은 후발주자였지만 정보전 덕택에 핵무기를 조기 개발해 군사적으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초기 핵정보전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세기적 정보전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과학자들이 핵 정보전의 중심역할을 한 것도 눈길을 끈다. 핵무기 개발은 과학적 전문성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핵무기 개발이 가져올 인류사적 파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저없이 용기를 내어 정보전에 뛰어들었다. 초기 핵정보전은 과학과 정보의 영역을 넘나들었다.

공산주의 이념도 핵정보전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소련의 핵무기 조기 개발 뒤에는 아무런 댓가도 받지 않고 핵개발 정보를 넘겨준 서방의 공산주의 신봉자들이 큰 역할을 했다. 미국으로서는 뼈아프지만 소련으로서는 이들 때문에 비교적 손쉽게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었다.

소련 내무인민위원회(NKVD) 1917년 12월 볼세비키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내무행정은 물론 검찰, 경찰 권한도 가진 현대사의 전무후무한 권력을 지닌 정보기관이다. (1946년 KGB로 개편)

맨해튼프로젝트(1942-1946년) 미국, 영국, 캐나다가 합동으로 추진한 원자폭탄 개발계획이다. 이를 위해 1943년 8월 퀘벡조약을 체결하고 1944년 11월에는 2차 대전 이후에도 핵무기 개발협력을 확장한다는 부속협약도 체결했다.

글을 쓰는 내내 현재의 한반도 상황과 오버랩되면서 여러 상념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우리의 정보력은, 혹은 정보기관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 저지를 위해 무엇을 했을까, 북한은 어떤 정보적 수단을 통해 국제사회의 핵개발 저지를 돌파했을까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만일 소련의 핵무기 개발이 늦어졌더라면 6·25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필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핵 스파이들이 소련의 핵무기 조기 개발을 도와주어 소련이 군사적 자신감을 얻었고 그 결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은 물리학자 로젠버그 부부를 재판한 미국의 어빙 카프먼 판사가 내린 결론이다.

최성규 고려대 연구교수.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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