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 끝에 나를 발견했다"…가수 이승윤도 울어버린 그 뮤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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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과 졸업생 권하정을 동굴 밖으로 꺼내준 것은 가수 이승윤의 작은 콘서트였다. 다큐멘터리 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 속 한 장면. [사진 시네마달]

영화과 졸업생 권하정을 동굴 밖으로 꺼내준 것은 가수 이승윤의 작은 콘서트였다. 다큐멘터리 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 속 한 장면. [사진 시네마달]

“이름이 있는데 없다고 해/ 명성이 없으면 이름도 없는 걸까/…신에게 이름을 물었더니 신이 말하길/ 난 이름이 없어” (이승윤 작곡ㆍ작사 ‘무명성 지구인’)

권하정(31) 씨는 대학 졸업 후 집에 틀어박혔다. 가수 이승윤(34)의 노래만이 위로였다. 자발적으로 외출할 마음이 처음 든 것도 작은 카페에서 열린 이 가수의 음악회, 처음으로 뭔가 해 보고 싶다 생각한 것은 이 가수의 뮤직비디오 제작. 한 번도 해 본 일 없는 그 일에 어떻게 용기가 났는지는 모르겠다. 김아현(30)ㆍ구은하(30), 함께 영화과를 다녔던 두 친구가 이 무모한 길에 동행했다.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를 먼저 만들어 열정을 증명해 보이기로 했다. 손 그림으로 어설프게 세트를 만들어 방에서 찍고 편집했다. "승윤 씨가 보고 좋아해야 할 텐데" "승윤 씨가 보면 울 것 같지 않냐" 자기들끼리 신이 났다.
콘서트가 끝나길 기다려 제대로 말도 못하고 USB 메모리와 편지를 주고 왔고, 이메일 회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영화처럼 가수의 답장이 왔다.

9월 6일 개봉 다큐 '듣보인간의 생존신고'

"내내 울다가 이렇게 메일 드립니다. 어떤 삶을 사셨는지 어떤 꿈을 포기하셨는지는 제가 알 수는 없지만 하정님 길에 제가 제 노래가 도움된다면 무조건 함께하고 싶습니다. 권하정 감독님의 팬 이승윤 올림"

가수 이승윤은 "당시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주겠다는 제안이 많았는데, 권하정(가운데) 감독님의 '우리 같이 영차영차 힘내서 만들어보자'는 제안은 '네 음악을 위해 뭔가 해 주겠다'는 다른 제안들과 달랐다"고 돌아봤다. [사진 시네마달]

가수 이승윤은 "당시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주겠다는 제안이 많았는데, 권하정(가운데) 감독님의 '우리 같이 영차영차 힘내서 만들어보자'는 제안은 '네 음악을 위해 뭔가 해 주겠다'는 다른 제안들과 달랐다"고 돌아봤다. [사진 시네마달]

다큐멘터리 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는 지금은 조회 수 70만 뷰를 기록하고 있는 3분 30초짜리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에서 시작됐다. 지난 29일 시사 후 진행한 기자간담회에서 권하정 감독은 “첫 뮤직비디오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것은 두려워서였다. 배우나 촬영감독ㆍ조명감독 등 영화 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고, 그들에게 나를 뭐라 설명해야 하냐는 질문부터 막혔다”고 돌아봤다. 이 회피와 도피의 선택 때문에 가수와 진짜 뮤직비디오를 만들 때는 ‘맨땅에 헤딩’을 해야 했지만, 또다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서울 집과 부산 숙소를 오가며 스터디 카페에서 가수와 만났고, 동대문 시장에서 의상을, 화방에서 소품 재료를 사들여 하나하나 만들었다. 코로나 19로 모임 인원 제한이 있던 때라 촬영감독, 스튜디오 섭외도 자주 어그러졌다. 우여곡절 끝에 ‘영웅수집가’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뒤 속 깊은 가수는 “시작은 이승윤이었지만 나중엔 이승윤은 안중에도 없고 각자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더라는 말이 좋았다. 거기 나와 내 노래가 참여해서 좋았다”는 소감을 남겼다. 지금은 JTBC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2021)의 ‘30호 가수’로, 또 우승자로 대중들에게 알려졌지만, 2020년 당시의 이승윤은 대학가요제에 올라간 뒤 9년,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앨범을 준비하던 때였다. 간담회에 동석한 이승윤은 "누군가가 꾼 꿈에 내 노래가 일조해 영광"이라며 "내 입장에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사활을 걸고 태운 불꽃이 다른 누군가의 불꽃에 닿으면서 조금 더 커진 것 같다"고 말했다.

뮤직비디오 '영웅수집가' 세트장에 모인 가수 이승윤(가운데)과 제작진. [사진 시네마달]

뮤직비디오 '영웅수집가' 세트장에 모인 가수 이승윤(가운데)과 제작진. [사진 시네마달]

3년 전 만든 이 79분짜리 다큐에는 영화제 관객들이 먼저 반응했다.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았고, 지난 10일 개막한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도 단시간에 매진됐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에너지 삼아 20대를 통과한 이들의 이야기에 다른 청춘이 공명한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때로는 무모하게 부딪혀도 괜찮다는 힘찬 응원의 메시지를 받았다”는 소감이 줄을 이었다. 이승윤은 “꿈꾸면 이루어진다, 열심히 사면 될 거라는 말은 죽어도 못하겠다. 다만 좋아하는 것에 오롯이 투신해 보고 나이가 드는 편이 후에 그 시절을 돌아볼 때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덕업일치'의 에너지를 담은 ‘팬 무비’는 청춘 영화의 한 장르처럼 제작되고, 또래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한때 국내 최대 이용자 수를 자랑했지만 지금은 운영진에 버림받은 RPG 게임 ‘일랜시아’를 여전히 좋아하는 팬들을 뒤쫓는 ‘내언니전지현과 나’(감독 박윤진, 2020년), 좋아하던 가수 정준영이 성범죄로 구속된 뒤 팬들의 인터뷰를 담아 만든 다큐멘터리 ‘성덕’(감독 오세연, 2022년) 등이 그렇다.

지난 29일 서울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듣보인간의 생존신고' 시사 후 기자간담회. [사진 시네마달]

지난 29일 서울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듣보인간의 생존신고' 시사 후 기자간담회. [사진 시네마달]

여전히 ‘듣보인간’(듣도 보도 못한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권하정 감독은 “첫 장편 영화를 만들고 개봉하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겪으면서 ‘영화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나’를 발견했다”고, 김아현 감독은 “희망이 곧 긍정을 뜻한다고 생각했는데, 좌절과 슬픔이 있어야 비로소 희망도 있음을 알게 됐다”고 돌아봤다. 9월 6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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