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안혜리의 시선

거친 표현에 진의 가려지는 대통령의 언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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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8일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놓고 "1+1을 100이라는 세력과는 싸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8일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놓고 "1+1을 100이라는 세력과는 싸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연합뉴스

"언론은 부당하게 짓밟고, 항의한다고 더 밟고, 맛볼래 하며 조진다. (장관들도) 이 횡포에 맞설 용기가 없으면 그만둬라. 언론과 적극적으로 접촉해 봐야 득 될 게 없으니 (기자들의 정부 부처 개별 취재를 막고) 공식 브리핑을 활용하자. 불공정하고 편파적인 기사에 민사소송 등을 위한 전문기관과 예산을 꾸리는 등 정부는 단호한 법 집행을 해라. "

이 발언은 지난 2003년 8월 노무현 대통령이 장·차관을 앞에 두고 한 발언이다. 장관더러 언론과 싸우라고 독려하는 이 낯선 장면은 즉각 '언론과의 전쟁 선포'라는 비판을 불러왔다. 하지만 이런 우려에 귀 기울이는 대신 거꾸로 대응 수위를 점점 더 높였다. 2007년 5월 재경부(현 기재부) 출입기자단 180여명이 정부의 기자실 통폐합과 취재원 접촉을 막기 위한 기자 출입 제한을 비판하는 성명을 내자 노 대통령은 "언론이 터무니없는 특권을 주장하는데, 일부 정당과 정치인까지 이에 영합하는 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브리핑룸에 더해 기사 송고실 폐지까지 지시했다. 임기 내내 공개적으로 언론을 타박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김영삼 정부 시절 25건에 불과했던 언론중재 신청을 752건이나 했다. 대통령 본인이 직접 16건의 정정·반론보도 청구를 했을 정도다.

언론 적대 국민 이분한 참여정부
그시절 생각나는 전투적 발언
정제된 언어로 갈등 줄였으면

언론과의 대립각은 국민 편 가르기로 이어졌다. 지난 2006년 3월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에서 노 대통령은 "근로소득세 90%를 상위 20%가 내고 있으니 혹시 세금을 올리더라도 상위 20%만 화가 나고 나머지는 손해 볼 것 없다"고 했다. 국민 통합에 나서야 할 대통령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대놓고 편 나눈 것이다.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를 위한 전략이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잡히지 않는 부동산값을 놓고는 정책 수정 대신 "강남이 불패라면 대통령도 불패"라며 강남 때리기에 골몰했다.

한 직장인이 지난 2006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이 진행한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를 보고 있다. 이날 노 전 대통령은 "상위 소득 20%" 발언으로 국민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편가르기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중앙포토

한 직장인이 지난 2006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이 진행한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를 보고 있다. 이날 노 전 대통령은 "상위 소득 20%" 발언으로 국민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편가르기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중앙포토

20년 전 일을 새삼 소환한 건 요즘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과 주요 부처 장관들의 행보에서 자꾸만 고(故) 노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 시절이 겹쳐 보여서다. 윤 대통령은 지난 29일 국무회의에서 노 전 대통령이 했던 것처럼 장관들에게 싸우라고 주문했다. "여러분(장관)은 정무적 정치인이기 때문에 말로 싸우라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여야 간극이 너무 넓으면 점잖게 얘기한다고 되지 않는다. 공격받기 싫다고 피해서는 안 된다. " 하루 전 국민의힘 연찬회에서는 "지금 국회는 여소야대에 언론은 전부 야당 지지 세력들이 잡고 있어서 24시간 우리 정부 욕만 한다"고 언론을 향한 불만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살아있는 권력에는 늘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게 숙명인 언론계를 전부 "야당 지지 세력"으로 규정했다. 앞서 통상 국론 통합을 얘기해온 8·15 광복절 경축사에선 "공산 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는 반국가세력들이 활개 치고 있다"고 했다. 무슨 걱정에서 나온 말인지는 알겠으나 대통령 품격에 걸맞은 정제된 언어와는 거리가 있다.

물론 답답한 윤 대통령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다수 의석을 무기 삼아 사사건건 윤석열 정부의 발목을 잡아 온 더불어민주당, 그리고 여기 발맞추는 듯한 일부 친 민주당 언론이 가세해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계기로 또다시 국익을 해치는 반일 선동에 나섰으니 화가 날 법도 하다. 하지만 "1+1을 100′이라고 하는 이런 세력들하고 싸울 수밖에 없다"는 식의 거친 발언은 비단 민주당뿐만 아니라 그저 일상과 건강을 걱정하는 보통 사람들까지 등 돌리게 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쯤에서라도 멈췄으면 좋겠는데, 요즘 대통령이 신뢰한다는 장관들의 행보를 보면 요원하다.

이 정부 장관들은 다들 지난해 10월 국감에서 저질스런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제기한 김의겸 민주당 의원을 향해 "나는 다 걸겠다, 의원님은 뭘 걸겠느냐"고 되받아쳤던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모범사례로 보는 모양이다. 원희룡 국토부 장관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도 잇따라 "장관직을 걸겠다"는 전투적 발언을 쏟아내니 말이다.

노 전 대통령은 한미 FTA 비준 등 성과도 적지 않았지만 언론과 대립하고 끊임없이 국민을 편 가른 탓에 노동개혁 등 국정의 주요 고비고비마다 제대로 된 국민의 협조를 끌어내지 못했다. 대통령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윤석열 대통령은 달라야 한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김건희 여사가 좀 나서줬으면 좋겠다. 비단 윤 대통령이라서가 아니라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서 아무리 최측근이라도 대통령 뜻에 거스르는 고언을 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김건희 여사는 대통령이 국민 눈높이에서 보다 정제되고 갈등을 유발하지 않는 섬세한 언어로 소통하도록 조언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라도 희망을 걸어본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