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봉준호·박찬욱 키드…칸·아카데미 사로잡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아카데미 국제 장편영화 부문 한국 출품작으로 뽑힌 ‘콘크리트 유토피아’. 주연 이병헌의 다양한 얼굴을 보여줬을 뿐 아니라 엄태화 감독이라는 박찬욱 감독의 다음 세대 연출가들을 대중에게 알린 영화이기도 하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아카데미 국제 장편영화 부문 한국 출품작으로 뽑힌 ‘콘크리트 유토피아’. 주연 이병헌의 다양한 얼굴을 보여줬을 뿐 아니라 엄태화 감독이라는 박찬욱 감독의 다음 세대 연출가들을 대중에게 알린 영화이기도 하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지난 5월 제76회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잠’이 상영될 때 사회자는 유재선 감독을 “봉준호 감독의 조수이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유 감독은 “전 세계에서 영화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 영화를 처음 보여주게 됐다. ‘이날이 나의 심판의 날이구나’ 두려움이 컸는데 다행히 기대 이상의 호응을 받았다”고 돌아봤다.

유 감독은 ‘옥자’(2017) 연출부 출신이다. 프리 프로덕션부터 촬영, 후반 작업, 그리고 통역으로 프로모션까지 함께하며 당시 연출부에서 가장 오래 일했다. 이런 인연으로 봉 감독은 “아끼는 후배가 있는데 재능이 있다”며 유 감독을 이선균·정유미 배우에게 소개했다. 지난 26일에는 서울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에서 열린 특별상영회에서 직접 사회까지 본 봉 감독은 “앨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봐도 칭찬했을 것 같다. 자기 영화가 상영될 동안 관객들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다시피 하는 것, 요즘으로 치면 휴대폰이 어디 있는지 잊을 만큼 몰입을 추구하는 게 그의 영화 인생 목표였다”고 칭찬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엄태화 감독(오른쪽)은 박찬욱 감독과의 대담 자리에 18년 전 ‘친절한 금자씨’ 연출부 시절 쓰던 슬레이트를 가져왔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콘크리트 유토피아’ 엄태화 감독(오른쪽)은 박찬욱 감독과의 대담 자리에 18년 전 ‘친절한 금자씨’ 연출부 시절 쓰던 슬레이트를 가져왔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34세에 장편 데뷔작을 칸에서 선보인 유 감독이지만, 영화 입문은 늦은 편이다. 대학 때 비로소 감독을 꿈꿨고, 졸업 후 영화 일을 시작했다. 유 감독은 “‘옥자’를 통해 어깨너머로 봉 감독님 연출을 본 게 가장 큰 도움이었다. ‘잠’ 제작 중에 고비마다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셨다”고 전했다. 정확한 콘티로 작업하는 봉 감독의 효율적인 작업 방식도 닮았다. 유 감독은 “쓰지 않은 장면은 딱 하나뿐, 촬영분의 95%를 영화에 활용했다”고 말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상영회가 지난 4일 서울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에서 열렸다. 엄태화(42) 감독은 관객과의 만남에서  “박찬욱 감독님은 제 나이보다 두 살 어릴 때 ‘올드보이’, 제 나이 때 ‘친절한 금자씨’를 찍었다. 저희끼리 만나면 ‘봉준호 감독님은 서른넷에 ‘살인의 추억’을 찍었는데 우린 뭐 하나’ 한다”라고 말했다.

이날 엄 감독은 18년 전 ‘친절한 금자씨’(2005) 연출부 때 쓰던 슬레이트를 들고 나왔다. 엄 감독은 ‘쓰리, 몬스터’(2004) 연출부 막내로 시작, ‘친절한 금자씨’를 거쳐 단편 ‘파란만장’(2011) 조감독으로 일한 ‘박찬욱 키드’다. 영화 개봉을 앞둔 후배를 응원하러 온 박 감독은 “각본도 읽었고, 가편집본도 봐서 아는 내용인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할 틈이 없었다”며 제작 과정에서 많은 조언을 했음을 밝혔다.

칸영화제에 초대된 ‘잠’. 주연 정유미의 다양한 얼굴을 보여줬을 뿐 아니라 유재선 감독이라는 봉준호 감독의 다음 세대 연출가들을 대중에게 알린 영화이기도 하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칸영화제에 초대된 ‘잠’. 주연 정유미의 다양한 얼굴을 보여줬을 뿐 아니라 유재선 감독이라는 봉준호 감독의 다음 세대 연출가들을 대중에게 알린 영화이기도 하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콘크리트 유토피아’에는 봉준호의 그림자도 보인다. ‘설국열차’의 머리 칸과 꼬리 칸, ‘기생충’의 저택과 반지하를 떠올리게 한다. 가진 것 없고 억울한 것 같은 주인공 영탁(이병헌)의 모습이 ‘기생충’의 주인공 기택(송강호)과 겹쳐진다. 경쟁이 치열한 여름 극장가에서 337만 관객을 넘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내년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 국제 장편영화 부문 한국 출품작으로 선정됐다.

‘올드보이’가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때가 20년 전인 2003년이다. 그 해 ‘살인의 추억’ ‘지구를 지켜라!’ ‘스캔들-조선 남녀상열지사’ ‘황산벌’ ‘장화, 홍련’ 등 개성 있는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며 한국 영화의 ‘끓는점’을 형성했다. 약 1700억원의 영화진흥기금이 조성되고, 수십 개의 투자조합이 생기면서 영화산업이 규모를 키웠다.

영화 ‘잠’ 특별상영회에 함께 참석한 유재선 감독(왼쪽)과 봉준호 감독.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잠’ 특별상영회에 함께 참석한 유재선 감독(왼쪽)과 봉준호 감독.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시간이 흘러 2020년, 밖에서는 ‘기생충’이 칸 황금종려상, 아카데미 작품상·감독상 등 4개 부문을 휩쓸었고, 안에서는 해마다 천만 관객 영화가 나올 정도로 한국 영화는 르네상스를 맞았다. 하지만 ‘포스트 박찬욱·봉준호가 없다’는 위기감도 나왔다. ‘더 문’ ‘비공식작전’ 같은 여름 대작들이 기대 이하 성적을 보였지만, 그래도 신진 감독들이 새로운 이야기를 꾸준히 들고나온다.

‘친절한 금자씨’ 스크립터였던 이경미 감독은 ‘미쓰 홍당무’에 이어 넷플릭스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자기만의 개성을 보여줬다. ‘기생충’ ‘헤어질 결심’ 조감독 출신 김성식 감독의 장편 상업영화 데뷔작 ‘천박사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은 추석 연휴 개봉 예정이다.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어두운 분위기 때문에 여름 성수기 시장에 맞지 않을 거라 했던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반향을 일으키며 전통적 관객이 건재함을 입증했다. OTT의 ‘무빙’ 등 세대교체의 감각을 갖춘 감독들이 대중적 성공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