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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승현의 시선

‘부전 공화국’, 언제까지 진단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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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사회부디렉터

김승현 사회부디렉터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가 “우리 사법부는 재판 지체로 ‘기능 부전’에 빠져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인사청문회 통과 시 6년간 이끌게 될 조직에 대해 ‘부전(不全)’이라는 진단을 한 것이다. ‘완전하지 않다’는 의미의 한자어 부전은 신부전(腎不全)·심부전(心不全)·간부전(肝不全) 등 병명에서나 보던 생소한 단어다. 하지만, 영어 표현을 보면 명료해진다. 신부전은 ‘kidney failure’, 심부전은 ‘heart failure’다. 실패(failure)나 기능 상실로 이해하면 그 심각성이 제대로 전해진다.

법원도 정부도 ‘기능부전’ 상태
윤 대통령 “나라 거덜나기 직전”
이젠 남 탓보다 치료법 찾아야

재판 지연이라는 부전은 통계상으로도 심각하다. 대법원 자료에 따르면, ‘김명수 코트’ 6년 동안 장기 미제 사건(2년 안에 1심 판결이 나오지 않은 사건)이 약 3배가 됐다. 코로나19로 사건이 늘지 않았는데도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때인 2017년엔 5345건이었다가 지난해 1만4428건이 됐다. 한 사람 또는 그 가족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재판이 1심에만 2년 넘게 걸린다는 건 끔찍한 현실이다. 중학생 자녀가 고교생이 되어서까지 송사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런 경험이 있다면 ‘법원 실패(court failure)’가 아니고 무엇이라 느끼겠는가.

이 후보자의 진단은 지난 28일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과도 맥이 닿는다. 국민의힘 의원 연찬회에 참석한 윤 대통령은 “우리가 국정운영권을 가져오지 않았더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겠나 하는 정말 아찔한 생각이 많이 든다”고 말했다. “벌여 놓은 일들로 나라가 거덜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라고도 했다. 망하기 직전까지 사장이 최고급 수입차를 타는 한심한 부실기업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사법 부전과 마찬가지로 문재인 정부의 부전, 실패라는 진단이다.

공영방송의 근본적 구조개혁을 취임 일성으로 내세운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의 접근법도 비슷하다. 그는 같은 날 정약용의 『경세유표』를 인용해 “털 하나 머리카락 하나 병들지 않은 게 없다. 지금 개혁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각종 특혜를 당연시하면서도 노영방송이라는 이중성으로 정치적 편향성과 가짜뉴스 확산은 물론 국론을 분열시켜 온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

같은 날 감사원의 ‘사교육 카르텔’에 대한 감사 착수 소식까지 더하면 가히 ‘부전(不全) 공화국’이라 할 만하다. 감사원은 보도자료에서 “교원 등 공교육 종사자와 사교육업체가 결탁해 경제적 이익을 주고받는 현상은 수능·내신 등 공교육 체계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심각하게 훼손시킬 뿐 아니라 정부 정책에 반하여 사교육 의존도를 심화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과 정부 곳곳에서 쏟아내는 진단에 대부분의 국민은 동의할 것이다. 재판 지연과 가짜뉴스 등 당위와 상식이 무너져 일상의 폐해가 되어버린 상황이 반복되고 있어서다. 그러나, 차고 넘치는 진단이 무슨 소용인가. 병을 진단했다고 명의라 부르는 게 아닌 것처럼, 치료를 못 하면 의미가 없다.

다시 사법부 얘기로 돌아가 보자. 이 후보자는 재판 지연을 해소하기 위해 판사 직무 분석으로 업무량을 계산하고 판사 수를 늘려서라도 재판 지체를 없애는 현실적인 대책을 강구 중이라고 한다. ‘김명수 코트’는 그런 방안을 몰랐을까. 2017년 9월 26일 김 대법원장의 취임사를 보면 다시 한숨이 나온다. 그는 “법관 및 재판지원 인력의 증원 등 좋은 재판을 위한 인적, 물적 여건 조성에 최선을 다하겠다. 현재의 어려운 여건 아래에서도 법원 가족 여러분께서 정의의 선언을 지연시키지 않으면서도 충실한 재판을 이룰 수 있는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데에 지혜를 모아 주시기를 당부드린다”고 했다. 진보·보수 진영의 선각자를 자처했던 어느 고위 법관도 진단만 했지 제대로 치료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 후보자는 간과해선 안 된다.

잇따르는 진단에 발맞춰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전 부처에 대한 복무 점검에 나선다고 하니, 종합병원의 혈액검사처럼 곳곳의 부전 현상을 객관적으로 포착하길 바란다. 그러나, 일각에서 나오는 우려도 귀담아들었으면 한다. 지난달 교육부 공무원의 국립대 사무국장 임용 논란 때 공직기강비서관실의 조사를 받았다는 한 대학 관계자는 ‘또 다른 부전’을 염려했다. 당시 공직기강비서관실의 권위적인 조사 방식에 깜짝 놀랐다는 그는 “시계가 거꾸로 가고 있다고 느꼈다”는 소회를 전했다. 기능 부전을 치료하기 위한 행위와 과정 또한 부전을 경계해야 한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