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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라고? '미망인' 뜻 뒤집었다…애 업고 "레디고" 외친 女감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영화 '미망인'을 만든 한국 최초 여성 감독 박남옥(우측 두번째). 남성 일색의 영화판에서 첫 연출 데뷔작을 만들어냈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영화 '미망인'을 만든 한국 최초 여성 감독 박남옥(우측 두번째). 남성 일색의 영화판에서 첫 연출 데뷔작을 만들어냈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돌도 안 된 딸을 맡길 데가 없어 포대기에 둘러업고 “레디 고”를 외쳤다. 제작비가 부족해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들 밥을 손수 지어 먹이기도 했다. 학창 시절 투포환 선수로 활약한 체력에다, “호탕하고 보기 드문 술고래, 영화밖에 모르는 사람”(유현목 감독)이란 평판도 전해 내려온다.
1950년대 남자들의 영화판에서 '여자라서 재수가 없다'는 고루한 편견에 맞서 데뷔작 ‘미망인’(1955)을 만든 한국 최초의 여성 감독 박남옥(1923~2017).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영화계 안팎에서 1세대 여성감독에 대한 조명이 잇따른다.
30일까지 메가박스 상암 월드컵경기장‧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리는 제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이하 여성영화제)는 26·29일 양일 간 마련한 특별전 ‘박남옥 탄생 100주년: 여성감독 1세대 탐구’를 통해 박남옥과 같은 시대에 활동한 두번째 여성 감독 홍은원 등을 돌아본다.

최초 女감독 박남옥 탄생 100주년 #영화제 특별전·다큐 제작 잇따라 #아기 포대기 하고 메가폰 든 여걸 #현장 스태프 밥 해먹이며 촬영 #데뷔작 '미망인' 전후 여성상 재정립 #2번째 홍은원 등 여성 감독 물꼬

따라죽지 못한 사람…사전의미 뒤집은 '미망인'

영화 '미망인'에서 주인공은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딸을 부양한다. 생계를 돕고자 하는, 죽은 남편 친구의 호의를 받아들이면서도 유부남인 그에게 선을 긋는다. 주인공에겐 따로 사귀는 애인이 있다. 사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영화 '미망인'에서 주인공은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딸을 부양한다. 생계를 돕고자 하는, 죽은 남편 친구의 호의를 받아들이면서도 유부남인 그에게 선을 긋는다. 주인공에겐 따로 사귀는 애인이 있다. 사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특별전 상영작은 총 5편이다. 먼저, 박남옥의 유일한 연출작으로 남은 ‘미망인’이다. 영상자료원에 결말부 영상과 일부 사운드가 유실된 채 네거티브 필름만 남아있던 ‘미망인’을 세상에 다시 공개한 게 1997년 제1회 여성영화제다. 한국영화사에서 여성 영화인이 새롭게 조명되며 이후 사단법인 여성영화인모임 결성, 『여성영화인사전』(2001) 출간 등의 발판이 됐다.
박남옥은 경북 경산에서 포목상을 하던 대가족의 10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신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화여전 재학 시절 영화에 빠진 그는 대구에서 신문 기자로 일하다 영화 촬영소에 취직하며 영화 일을 시작했다. 편집 조수, 스크립터 등을 거쳐 한국전쟁 중 국방부 촬영대에서 종군영화를 만들고 종전 후 첫 연출작 '미망인'을 내놨다.
그간 박남옥이 영화판의 유리천장을 뛰어넘은 선구자로 회자됐다면, 올해 여성영화제는 ‘미망인’이 여성 서사를 다룬 방식에 주목했다. ‘미망인’은 전쟁 후 어린 딸과 단둘이 남은 주인공이 죽은 남편의 부유한 친구에게 도움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개척해가는 여정을 그린다. 이를 통해 ‘남편이 죽고 홀로 남은 과부,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사람’이란 제목의 사전적 의미를 전복시켰다. 전후 미망인을 팜므파탈 또는 희생적 모성이란 이분법적 사회 통념에 가두지 않았다. 여성영화제 이사장 겸 조직위원장인 변재란 교수(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는 미망인을 등장시킨 수많은 한국영화들과 차별화된 작품이라고 짚었다.

1950년대 女판사, 남편 열등감에 고뇌했죠

 영화 '여판사'로 데뷔한 한국 두번째 여성 감독 홍은원. 영화계 입문 경력은 박남옥 감독을 앞선다. 박남옥 감독과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로 알려져있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영화 '여판사'로 데뷔한 한국 두번째 여성 감독 홍은원. 영화계 입문 경력은 박남옥 감독을 앞선다. 박남옥 감독과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로 알려져있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홍은원의 데뷔작 ‘여판사’(1962)는 당시 주목받은 최초 여성 판사 실화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과년한 딸을 걱정하는 부모에게 “판사가 될 때까지 전 여자가 아니에요!”라고 선언할 정도의 각오로 열심히 공부해 판사가 된 주인공이 여성 판사에 대한 사회적 편견, 자신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남편, 시집살이 고충 등을 헤쳐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여성영화제 황혜림 프로그래머는 “여성 직업인의 사회인으로서 입장과 가정 내 갈등을 다룬 점이 현대적”이라면서 “‘미망인’과 더불어 여성 서사를 고민한 맥락이 지금 시점에도 유효하다”고 말했다. 29일 ‘미망인’, ‘여판사’ 상영 후엔 대담 및 강연도 마련돼있다. 지난해 영화 ‘오마주’에서 홍은원을 조명한 신수원 감독, 변재란 이사장, 권은선 중부대 연극영화학과 교수가 참석한다.

공연계도 박남옥 조명, 뮤지컬 '명색이 아프레 걸'

이에 앞서 26일에는 임순례 감독이 박남옥부터 1970년대 ‘첫경험’을 찍은 황혜미 감독 등 여성 감독들의 활약을 조명한 ‘아름다운 생존: 여성 영화인이 말하는 영화’(2001), 박남옥의 삶과 꿈을 비춘 김재의 감독의 ‘꿈’(2001) 등 2편의 다큐멘터리를 연달아 상영한다.

영화 '꿈'. 사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영화 '꿈'. 사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박남옥의 전기 뮤지컬 기록영화 ‘명색이 아프레 걸’(2022)도 26일 상영된다. 첫 딸 출산 사흘 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온 박남옥이 한국전쟁 미망인에 관한 영화 제작을 결심하는 일상과 영화 ‘미망인’ 내용이 극 중 극 형태로 어우러진다. 2021년 김광보 연출로 국립극장에서 초연, 이듬해 규모를 확장한 동명 공연 실황을 기록한 작품이다.

탄생 100주년 박남옥 다큐 해외서도 나온다 

박남옥에 대한 재조명은 계속된다. 한국영화사에서 영향력을 확장해가고 있는 여성영화인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시도다. 황혜림 프로그래머에 따르면 현재 박남옥에 관한 2편의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대구MBC에서 박남옥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영화연구자 사이먼 맥켄테가트 감독도 한국영화사에서 박남옥이 차지하는 위상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라고 황 프로그래머는 전했다.

동명 뮤지컬의 실황을 기록한 영화 '명색이 아프레걸'. 사진 국립극장

동명 뮤지컬의 실황을 기록한 영화 '명색이 아프레걸'. 사진 국립극장

여성영화제가 2008년부터 수여해오고 있는 박남옥상의 올해 수상자는 섭식장애로 고통받는 딸과 딸의 병에 무력한 엄마 간의 관계를 파고든 다큐멘터리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을 만든 김보람 감독이다. 영화제 측은 “여성의 몸에서 시작해 모녀 관계, 여성 사회활동가였던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여성 생애사를 써나간다”는 심사평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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