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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윤석만 논설위원이 간다

아프리카 그린 동양 최고 세계지도, 파리·로마 정확 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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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윤석만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중화주의 오명 조선 ‘혼일강리도’ 재평가 움직임

윤석만 논설위원

윤석만 논설위원

1402년 조선이 만든 세계지도에 파리(法里·법리)와 로마(剌沒·라몰)가 정확히 표시돼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심지어 아프리카의 해안선과 나일강의 수원(水源)까지 자세히 그려져 있으면? 이 모든 궁금증을 한 번에 불식시키는 것이 바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강리도)’이다. ‘혼일강리’는 혼연일체의 강역이란 뜻으로 몽골의 세계상을 지칭하며, ‘역대국도’는 역대 국가의 도시라는 의미다.

대한지리학회장을 지낸 양보경 전 성신여대 총장은 강리도에 대해 “아프리카 대륙이 제 모습을 갖춘 칸티노 세계지도(1502년)보다 100년 앞서 아프리카 대륙을 사실적으로 그린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지도”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과 유럽·이슬람의 지리학과 몽골제국의 세계적 시야, 한민족의 지적 능력이 융합된 세계적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했다.

서구·일본은 찬사, 한국선 왜곡
중국 과장 이유 ‘사대주의’ 평가

NYT “당대의 가장 완벽한 지도”
정화의 원정보다 10여년 앞서

원본 없고, 4개 사본만 일본에
다음달 2일 지도의 날 제정 기념

하지만 강리도는 오랫동안 중화주의의 소산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지금도 여러 역사교재와 대중서적 등이 강리도를 사대주의의 표본으로 삼는다. 이 같은 인식을 바로잡고자 최근 학계에서는 강리도가 만들어진 날을 기념해 ‘지도의 날’(9월 첫째 토요일)을 제정했다. 다음달 2일 첫 ‘지도의 날’을 앞두고 강리도의 역사적 의미와 향후 과제 등을 살펴봤다.

좌·우의정이 만든 세계지도

일본 류코쿠대에 있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사본.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로 원본은 1402년 조선에서 제작됐다. [사진 김선홍]

일본 류코쿠대에 있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사본.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로 원본은 1402년 조선에서 제작됐다. [사진 김선홍]

“천하는 지극히 넓다. 안으로는 중국으로부터, 밖으로는 사해에 이르기까지 몇 천만리에 이르는지 알 수 없다. 이것을 줄여 몇 자 폭의 지도를 만드니 상세할 수는 없을 것이다. (…) 건문(建文) 4년 여름에 좌정승 김사형과 우정승 이무가 다른 지도들을 참고해 연구한 후 이회에게 명하여 자세히 교정하고 합쳐서 한 장의 지도를 만들었다. (…) 특별히 우리나라는 크게 그리고 일본을 덧붙여 지도를 완성했다.”

강리도 하단에 적혀 있는, 참찬 권근이 쓴 발문의 일부다. 이에 따르면 1402년 8월(음력)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좌·우의정이 합심해 지도를 만들었다. 강리도의 제작 목적으로 “지도를 보고 지역의 원근을 아는 것은 통치에 도움이 되며,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어 좋다”고 밝혔다. 훗날 권근은 자신이 쓴 문집에도 비슷한 내용을 담았다.

실제로 강리도에는 신대륙 발견 이전, 당시 인류가 알던 세상의 거의 모든 지리 정보가 담겨 있다. 동일한 축적을 쓰지 않아 한반도와 중국이 실제보다 크게 묘사돼 있지만, 아프리카 대륙과 인도 반도의 해안선은 현재의 위성지도와 비슷하다. 유럽과 아랍 국가의 도시명도 수백 개를 써 놨다. 기원전 280년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진 파로스 등대처럼 명승고적도 표시해 뒀다.

사대주의 편견 벗어나야

1415년 정화의 대원정 때 아주란왕국(소말리아)에서 받은 기린을 묘사한 청나라의 그림. [사진 위키피디아]

1415년 정화의 대원정 때 아주란왕국(소말리아)에서 받은 기린을 묘사한 청나라의 그림. [사진 위키피디아]

하지만 대중의 인식 속에 강리도는 중화론의 표본처럼 왜곡돼 있다. 17년간 연구 끝에 지난해 10월 『1402 강리도』를 펴낸 김선흥 전 주칭다오 총영사는 “중국이 크게 그려져 있다는 단편적 사실 하나만으로 국내에서만 유독 강리도를 평가절하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중·고교 한국사 강의 영상과 교재에서 강리도를 ‘곤여만국전도’(1602년)와 비교해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EBS 유튜브 채널의 ‘혼일강리역대국도와 곤여만국전도의 차이점’이라는 제목의 영상에선 “같은 세계지도지만 완전히 다르다”고 설명한다. 강리도에 대해선 “중국을 왜곡되게 크게 그려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란 걸 보여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상의 중심인 중국을 사대하는” 조선 전기 사대부의 인식을 지적했다. 반대로 곤여만국전도에 대해선 “중심이 중국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며 탈중화적 의미를 설명했다.

물론 강리도의 한 가운데엔 중국이 있다. 하지만 강리도에는 권근의 발문과 같이 한반도의 면적이 실제와 비교해 중국보다 3배나 크게 그려져 있다. 아울러 동양 최초로 인도와 아프리카, 유럽의 지리 정보를 담았다. “중국 중심의 지도를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것”(『한국의 지도』)이라는 방동인 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의 말처럼 강리도에선 중화를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조선인의 인식이 돋보인다.

세계인의 강리도 찬사

처음 강리도를 연구하기 시작한 건 일본이다. 강리도의 존재가 제일 먼저 알려진 곳이 1910년 교토에서였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의 지리학자 오가와 다쿠지(小川琢治)는 교토 소재 류코쿠(龍谷) 대학에 있던 강리도 사본을 찾아내 모사했다. 류코쿠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원 영지를 내준 것으로 유명한 서본원사(西本願寺·니시혼간지)가 설립한 대학이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강리도가 처음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를 임진왜란 때로 본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강리도의 원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4개의 사본만 일본에 존재한다. 그 중에선 1481~1486년 조선에서 모사돼 일본으로 건너간 류코쿠본이 가장 오래됐다. 발견 당시 커다란 족자 형태로 비단 위에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크기는 가로 171.8㎝, 세로 164㎝였다. 한국에선 1960년대에 처음 강리도의 존재를 알게 됐고, 80년대 이후 류코쿠본을 모사해 서울대 규장각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했다.

서양에는 한국보다 20년가량 먼저 알려졌다. 1946년 독일의 역사학자 발터 푹스가 강리도의 존재를 밝혔고, 영국의 유명 역사학자 조지프 니덤이 1959년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6쪽에 걸쳐 강리도를 설명했다. 니덤은 강리도에 담긴 지리 정보가 서양보다 훨씬 앞서 있다고 평가했다. 그 이유로는 몽골을 통해 아랍·페르시아인, 튀르크인과의 접촉을 통해 지식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도에 담긴 개방·다양성

강리도가 세계적 명성을 얻은 건 1992년 미국 워싱턴DC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콜럼버스 항해 500주년 기념행사에서였다. 이때 류코쿠본을 보고 전시회 도록에 소개문을 쓴 개리 레드야드 컬럼비아대 교수는 “15세기 유럽에서 만든 지도 중에 강리도 만큼 잘 그린 지도는 없다”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도 “당시 세계를 그린 가장 완벽하고 오래된 세계지도”라고 묘사했다.

일각에선 정화의 대원정(1405~ 1433년)에 강리도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도 있다. 영국의 작가 개빈 멘지스는 “정화의 함대가 강리도를 참고해 아프리카까지 갈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 그러나 멘지스의 주장은 하나의 가설일 뿐 직접적 증거는 없다. 다만 아프리카를 표시한 강리도의 세계관이 당시 중국에도 공유돼 있던 건 명확한 사실이다.

현존하는 강리도 사본으로는 류코쿠본 외에도 혼코지본, 텐리대본, 혼묘지본이 있다. 나머지 3개는 모두 16세기 이후 류코쿠본을 모사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1988년 나가사키현의 혼코지(本光寺)라는 오래된 사찰에서 발견된 혼코지본은 류코쿠본과 달리 일본 열도가 자세히 그려져 있고 16세기 이후 지리 정보가 추가돼 있다. 크기도 가로 276.8㎝ 세로 219㎝로 류코쿠본의 2배 정도다.

고려인의 글로벌 감각

강리도가 만들어진 건 조선 건국(1392년) 10년 뒤의 일이지만, 그 안에 담긴 지리 정보는 이미 고려인들이 모아놓은 것이었다. 특유의 개방·다문화 정신으로 글로벌 사회를 이뤘던 고려의 감각과 세계제국을 이룩한 몽골의 지식이 합쳐져 강리도를 완성했다. 미야 노리코 교토대 교수는 “강리도에는 13~14세기 광대한 영역을 장악했던 몽골제국의 세계 인식이 투영돼 있다”고 설명했다(『조선이 그린 세계지도』).

‘빼어난 아름다움(高麗)’이란 국호처럼 고려는 아라비아 상인까지 드나들던 매력국가였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1241년)』에 묘사돼 있듯 개경의 국제항인 벽란도는 어선과 관선(조운선), 외국 상선이 즐비해 나루 사이를 잇는 배다리(船橋)를 형성하기 일쑤였다. “아침에 출발하면 한낮이 못 돼 남만(현 중국과 베트남 접경지역)에 이른다”던 이규보의 표현대로 벽란도는 동아시아의 대표적 국제항이었다.

양보경 전 총장은 “관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물을 들여와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우리 문화의 DNA”라며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K컬처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했다. 김선흥 전 총영사는 “강리도에 담긴 선조들의 주체성과 개방정신이 조선 중기 이후 계승되지 못해 쇠락의 길을 걸었다”며 “글로벌 시대를 사는 우리가 강리도에 담긴 정신을 꼭 배워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