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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인도의 화폐 전쟁…“달러에 함께 맞서자” 동상이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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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민정 기자 중앙일보 기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두 정상은 오는 22~24일 남아공에서 열릴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회담을 가질 계획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두 정상은 오는 22~24일 남아공에서 열릴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회담을 가질 계획이다. [로이터=연합뉴스]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공동 통화요? 웃기는(ridiculous) 일이죠. 중국과 인도가 사사건건 부딪치고 적대 관계에 있는 한 미국 달러 패권을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합니다.”

신흥 경제대국을 뜻하는 ‘브릭스’ 용어를 처음 만든 짐 오닐 전 골드만삭스 자산운용 회장이 오는 22~24일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릴 제15차 브릭스 정상회의를 앞두고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꺼낸 말이다.

이번 브릭스 정상회의에서는 회원국 추가 등 외연 확장과 중국이 주도하는 ‘탈(脫)달러화’가 주요 의제가 될 전망이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지난 17일(현지시간) 네덜란드 ING은행이 공개한 보고서를 인용해 “브릭스 정상회의가 열리는 올여름에 탈달러 의제가 어느 정도 호응을 얻을 것으로 본다”고 내다봤다.

중, 러시아 혼란 속 위안화 공세
인도, 루피화로 중국 견제 나서
셈법 다른 두 나라의 샅바 싸움
올 브릭스 정상회의 성과 낼까

“탈달러화 현실적으로 불가능”

그러나 브릭스 내 ‘빅2’로 통하는 중국과 인도의 샅바 싸움이 ‘탈달러화’를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 제재에 직면한 러시아는 사실상 브릭스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런 와중에 위안화로 달러 중심 체제를 흔들고 싶어하는 중국은 인도의 행보에 내심 긴장하고 있다. 위안화 중심으로 브릭스가 재편되는 게 마뜩잖은 인도는 루피화를 부각하면서 브릭스 내 ‘중국 쏠림’을 경계하는 모양새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지난해 3월 국제통화기금(IMF)이 내놓은 ‘달러 지배력의 은밀한 침식: 비전통적 준비 통화 부상’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세계 외환 보유액의 달러 자산 비중은 최고 73%에서 58% 선으로 내려앉았다. ‘석유는 반드시 달러로 거래한다’는 1970년대 페트로-달러 비밀 협약이 일부 위협받는 정황도 노출되고 있다. 중국은 브라질 등 신흥 경제국과 양자 협정을 빠른 속도로 체결해 나가면서 달러 패권을 위협하고 있다.

지난 3월에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 브라질-중국 교역에 헤알화와 위안화를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아르헨티나 역시 4월부터 중국에서 상품을 수입할 때 위안화로 결제하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에 인도는 ‘루피화 띄우기’에 나서며 끼어들고 있다. 인도 중앙은행인 RBI는 지난해 7월 인도 화폐인 루피로 무역 대금을 결제할 수 있도록 통합결제인터페이스(UPI)를 구축하는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이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는 국가는 주로 달러가 부족한 스리랑카나 국제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 등이다.

인도는 브릭스 회의를 앞둔 지난 14일 아랍에미리트(UAE)와 루피화를 사용한 최초 석유 거래를 체결했다. 국영 인도석유공사가 중동 산유국 UAE에서 100만 배럴의 원유를 들여오면서 대금 결제를 달러화가 아닌 인도 루피화로 했다는 뜻이다. 인도가 루피화로 원유 수입 대금을 결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인도는 이처럼 루피화를 무역 대금 결제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국제사회에서 루피화의 위상 강화 등을 꾀하고 있다.

물론 탈달러 대안으로 루피는 여전히 위력이 약하다. 인도의 움직임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국제 무역에서 중국의 위안화 점유율이 높아지고 있는 데 따른 경계 성격이 짙다. 특히 브릭스가 중국 중심으로 굳어지고, 미국 대 브릭스 대결 구도가 강화하면 인도로서는 자국이 얻는 이점보다 잃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중국·러시아와 달리 서방과 유연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도로서는 미국과 노골적인 라이벌 구도를 이어가는 게 외교적으로 반드시 이득은 아니다. 지난 6월 모디 인도 총리의 미국 국빈 방문 때 미국이 인도에 선물을 안겨줬다. 당시 인도와 미국은 중국의 제재를 받는 미국 반도체회사 마이크론이 인도에 새 공장을 짓고, 양국이 전투기 엔진을 공동 생산하는 데 합의하는 등 첨단기술·국방·무역 등 전 분야에서 파트너십을 구축했다. 미국이 중국 견제를 위해 인도를 끌어들이려 시도한 것이다.

모디 총리는 최근 ‘줄타기 외교’로 몸값을 바짝 높이고 있다. 인도는 전통적으로 비동맹 중립 외교 노선을 추구해 왔다. 누구 편을 들지 않으면서도 중요한 경제·군사·외교 협력 상대로 꼽혀 강대국들의 구애를 받는 상황을 100% 활용하려는 외교 노선이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에 인도는 인구·시장 규모에서 중국을 대체할 유일한 나라이고, 서방 제재로 주춤하는 러시아도 주요 교역국으로서 늘 인도를 우선순위에 올리고 있다.

인도 모리 총리의 줄타기 외교

모디 총리가 이번 브릭스 정상회의를 기점으로 보다 세를 과시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당초 모디 총리는 이번 브릭스 정상회의에 직접 가지 않고 화상 연결 등을 통한 간접 참석을 얘기해오다 입장을 바꿔 직접 방문을 선택했다. 러시아가 국제적으로 고립되면서 브릭스 내 중국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는 상황에서 이를 견제할 유일한 대항마가 인도이기 때문이다.

브릭스의 공동 목표인 달러 패권에 대한 도전이 성공하려면 브릭스 ‘빅 2’의 협력이 필수라는 주장이 나온다. 짐 오닐은 FT에 “나는 종종 중국 정책 입안자들에게 얘기한다”며 “끝없는 역사적 전투를 잊고, 몇 가지 큰 당면 과제에 대해 서로 대승적으로 리더십을 공유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인도를 초대하라. 그러면 세계가 당신(중국)을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브릭스가 중국만을 위한 경제 블록의 냄새가 나지 않도록 인도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초국가적으로 브릭스 이니셔티브를 설계해 나가야 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