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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부산 영화거리 모습, 미국산 최루탄 보여준 시위 학생... 사진과 문화재 기증한 미국인 민티어 부부 이야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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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3호 20면

한국 서화·사진 기증한 미국 민티어 부부  

게리와 메리 앤 민티어 부부. 최기웅 기자

게리와 메리 앤 민티어 부부. 최기웅 기자

 민티어 부부의 한국 봉사 활동 당시 사진. [사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민티어 부부의 한국 봉사 활동 당시 사진. [사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한국은 정말 놀랍게 바뀌었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친절하고 열린 마음을 갖고 있어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조선 후기 매죽도 등 문화유산 150점과 1970년대 부산의 생생한 생활상을 담은 희귀한 사진자료 1366점을 기증한 미국인 민티어 부부의 말이다. 부부는 50여년 전 평화봉사단(Peace Corps)의 일원으로 한국에 왔다. 그전엔 한국이 지도 어디에 위치한 나라인지도 잘 몰랐다. 1969년부터 1975년까지 부부는 서울과 부산의 대학들에서 영어 강의 봉사 활동을 했다. 그러면서 점차 한국인의 정과 전통문화에 매료되었고, 이것이 수천 장의 사진과 한국 서화 수집으로 이어졌다.

부부가 기증한 사진은 9월 3일까지 부산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1970년 부산, 평범한 일상 특별한 시선’ 전시에 나와 있다.

사진들을 보면 1970년 당시 부산 보수동 산동네 모습, 수입 캔이 가득한 부평깡통시장과 거리의 장난감 가게, 당시만 해도 존재했던 지게꾼과 고물상, 지금은 사라진 서면 부산탑의 모습 등 흥미로운 풍경과 광경이 가득하다. 남포동 부영극장의 대형 광고판 사진이나 남포동 대영극장의 임권택 감독 초기작 ‘그 여자를 쫓아라’(1970) 손그림 간판 사진은 지금 국제영화제의 도시가 된 부산의 오랜 영화 사랑을 증언하는 귀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부영극장 사진에서 서부영화  '막켄나의 황금'의 거대 카우보이 광고판 아래로 보따리를 든 한복 차림 여인들이 지나가는 광경이 흥미롭다.

문화유산·사진 1516점 대가 없이 기증

민티어 부부의 기증 사진 중 1970년 부산 남포동 대영극장. [사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민티어 부부의 기증 사진 중 1970년 부산 남포동 대영극장. [사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1970년 부산 남포동 부영극장 '막켄나의 황금'(1969) 개봉 당시 모습. [사진 부산박물관]

1970년 부산 남포동 부영극장 '막켄나의 황금'(1969) 개봉 당시 모습. [사진 부산박물관]

중앙SUNDAY는 부산 전시를 보기 위해 방한한 민티어 부부를 서울에서 만났다. 50여 년 전 서울과 부산에서 찍은 사진 속에서 20대 후반의 젊은 모습으로 환하게 웃고 있던 게리 E. 민티어와 메리 앤 민티어 부부는 이제 77세의 나이에 걸맞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지만 생기 넘치는 눈동자와 미소는 여전했다. 다음은 그들과의 일문일답.

평화봉사단으로서 한국에 온 것은 두 분의 선택이었나요?
게리 “기관에서 지정해 준 것이었어요. 우린 한국에 대해서 16년 전에 전쟁(6·25)이 끝났다는 것밖에 몰랐어요. 지도에서 한국을 찾아 아내에게 보여주었죠. 그리고 하와이에서 넉 달 동안 한국어와 문화에 대해 배운 다음 1969년 1월에 한국에 왔죠. 부산으로 내려가서 저는 동아대학교에서, 아내는 부산여자대학(현 신라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방문 교수를 위한 집이 있었고 요리와 빨래를 해 주는 한국인 가족이 있었어요. 그들은 우리의 한국 가족이 되었고 지금도 저희가 한국에 올 때마다 만난답니다.”
한국 음식은 입에 맞으셨나요?
메리 앤 “처음엔 아니었어요. 원래 쌀과 생선을 좋아해서 부산에서 매일 밥과 생선을 먹으니 좋았지만 김치는 너무 매워서 못 먹겠더라고요. 하지만 지금은 모든 종류의 김치를 다 먹고 직접 담근답니다. 한국 음식도 만들곤 하죠.”
 민티어 부부의 기증 사진 중 1970년 부산 보수동 산동네. [사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민티어 부부의 기증 사진 중 1970년 부산 보수동 산동네. [사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한국의 첫인상은 어땠나요?
게리 “무척 가난했지만, 사람들이 친절하고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다만 부산에서 나와 아내의 처지가 다르긴 했어요. (남자인) 저는 밤에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과 어울려 다니며 막걸리를 마실 수 있었지만 아내는 집에 있을 때가 많았죠. 그래서 저는 아내보다 빨리 한국 음식을 좋아하게 됐어요. 그런데 한국어는 오히려 아내가 더 빨리 배웠어요.”
메리 앤 “집에서 (밥과 빨래를 해 주는) 한국 아주머니와 그 딸과 많이 대화하다 보니 한국어가 빨리 늘었답니다.”
그렇다면 두 분은 부산과 서울 중 어느 도시가 더 좋은가요?
게리 “그건 마치 부모에게 두 명의 자식 중 누가 더 좋으냐고 묻는 것과 같아요.(웃음)”
메리 앤 “각자 서로에게 없는 매력을 가졌죠. 그런데 제 경우에는 서울이 더 살기 편하긴 했어요. 더 현대적이라 여성이 갈 수 있는 곳,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서였죠. 부산은 당시에 상당히 전통적이었거든요. 요즘도 서울에 비해선 그런 것 같아요.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생각나는데, 부산에서 게리의 학교 교수님들이 그를 저녁식사에 초대했죠. 아내도 함께 오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인사치레로 권했던 것 같아요. 기생집이었거든요.(웃음) 하지만 저는 뭘 몰라서 따라갔죠. 한복을 입은 아름다운 여성들이 가야금을 타고 춤을 추는데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그리고는 남성 손님들에게 다리 마사지를 해주는데, 게리는 내가 옆에 있으니 못 받았죠.
민티어 부부가 기증한 부산의 장난감 가게 사진 [사진 부산박물관]

민티어 부부가 기증한 부산의 장난감 가게 사진 [사진 부산박물관]

그밖에 재미있는 에피소드라면요?
메리 앤 “너무나 많지만, 한 가지만 더 얘기하면, 당시 부산에선 외국인이 거리에 가만히 서 있으면 안 되었어요. 왜냐하면 5분 안에 한국인 백 명이 우릴 에워싸고 구경할 것이기 때문이에요. 요즘에야 아무도 외국인을 안 쳐다보지만요. 그때는 그랬고, 사람들이 말도 걸지 않고 가만히 우리가 뭔가 하길 기대하는 거에요. 한번은 친구를 기다리다 그런 일을 겪어서 결국 게리가 돌 위에 올라가서 영어 강연을 했답니다. ‘금본위 제도를 존속하는 게 좋으냐 아니냐’로요. (미국은 1971년 금본위제를 폐지했다.)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모두 진지하게 보고 있었죠.”
게리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일은 우리가 서울에 있었을 때 -이번 부산박물관 전시에 그때 찍은 사진이 나와 있지만- 학생들이 헌법을 바꾸는 것(1972년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었어요. 최루탄에 맞거나 체포될 수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들은 용감하게 거리에 나섰어요. 그들은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어요. 그들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한 학생이 떨어진 최루탄을 들고 와서 내게 보여주며 ‘메이드 인 USA’라고 하면서 왜 미국이나 한국이나 이런 걸 만들고 사람들에게 쏘느냐고 물었지요. 나는 할 말이 없었어요. 뭉클한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종류 김치 담그고 한국 음식 즐겨

부산 사진들도 참 흥미롭습니다.
게리 “한국은 우리가 처음 와 본 아시아 나라였어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에겐 평범한 모든 것이 우리에겐 색다르게 보였고 그걸 기록하고 싶었죠. 그 중에는 지금의 한국인이 더 이상 보지 못하는 것들도 있을 거예요. 부산박물관에서 이 사진들을 가지고 정말 좋은 전시를 만들어 주었어요. 제가 그냥 물감과 붓을 제공한 사람이라면, 전시를 기획한 미스터 리(이성훈 학예연구사)는 그 물감과 붓으로 멋진 그림을 그려낸 예술가라고 할 수 있어요.”
메리 앤 “전시에 들어가는 순간 정말 말 그대로 눈물이 나오더군요. 정말 아름다웠어요.”
민티어 부부의 기증 문화재 중 문인화가 송수면(1847~1916)의 매죽도 7점 중 2점. 묵매와 호접도로 유명한 송수면의 작품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사료된다. 송수면의 다른 매죽도 작품과 비교해도 우수한 작품이다. [사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민티어 부부의 기증 문화재 중 문인화가 송수면(1847~1916)의 매죽도 7점 중 2점. 묵매와 호접도로 유명한 송수면의 작품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사료된다. 송수면의 다른 매죽도 작품과 비교해도 우수한 작품이다. [사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고미술은 어떻게 소장하시게 되었고 또 어떻게 기증하시게 된 건가요? (부부는 조선 후기의 주요 문인화가 송수면(1847-1916)의 매죽도 7점과 조선 중기의 학자 이유장(1625-1701)이 유교 경전 『춘추』를 편집해 엮은 『춘추집주』의 희소한 목판 등 150점을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의 협의를 통해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했다.도서관 관계자들이 기증품 파악을 위해 민티어 부부의 미국 자택을 방문했을 때, 부부가 한국 거주 당시 촬영한 많은 사진을 보게 되었고, 이들이 한국 현대사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해 재단에 알렸다. 재단과 부부는 추가 논의를 통해 이 사진들을 부산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게리 “이곳에 와서 한국 (전통)미술과 사랑에 빠졌어요. 돈이 별로 없어서 많이 살 수 없었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수묵화를 한 점씩 사들였어요. 그 그림들이 지난 50여년 간 (미국) 집에 걸려 있었죠.”
메리 앤 “수묵화는 그 간결함이 좋아요. 특히 여백이 그냥 빈 공간이 아니라 그림의 일부로서 많은 걸 함축하고 있잖아요. 서울에 와서는 우리가 미술작품을 수집한다는 얘길 듣고 시골을 돌아다니며 서화와 골동품을 모으는 사람이 한 달에 한 번씩 집에 오곤 했어요. 그때마다 한두 점씩 사곤 했죠.”
게리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가 죽으면 이 그림들이 산산이 흩어져버릴 수 있겠고 그걸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작품을 샀던 시절은 한국인들이 밥 한 끼를 위해 열심히 일해야 했고 예술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던 시절이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모든 사람이 예술의 가치를 알고 즐기니 한국으로 돌려 보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50년 간의 임시보호자였던 셈이죠. 자식들과 손주들에게 갖고 싶은 그림을 한 점씩만 고르라고 했어요. 문화재 가치가 커 보이는 것은 돌려보내야 하니 제외하고요. 그리고 한국의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연락이 닿아 몇 년 간 의견을 나누었죠. 나는 대가는 전혀 필요 없고 대신 이 작품들이 한 곳에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고수했습니다. 결국 그럴 수 있는 장소로 국립중앙도서관이 정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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