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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로코 주인공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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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과자밖에 모르던 제과 연구원의 첫사랑을 그린 영화 ‘달짝지근해’. 배우 유해진은 “어른들을 위한 소나기”라고 말했다. [사진 마인드마크]

과자밖에 모르던 제과 연구원의 첫사랑을 그린 영화 ‘달짝지근해’. 배우 유해진은 “어른들을 위한 소나기”라고 말했다. [사진 마인드마크]

십여 개의 알람 시계로 하루를 시작한다. 발가락 사이까지 솔로 닦고서야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오전 8시 정각. 녹색 프라이드 승용차를 몰고 드라이브스루 햄버거집을 통과한다. 매일 같은 시각, 같은 메뉴를 주문하는 그에게 점원이 친근한 인사를 건넨다. 하지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른다. 점심시간에도 개발할 과자를 먹고 혼자 일하다가 오후 6시에 칼퇴근한다. 집과 회사만 오가며 과자만 먹다가 영양실조에 걸린 제과 회사 연구원 치호(유해진)다.

길 가다 시비가 붙어 째려보는데 하나도 안 무섭다. 가진 거라곤 가끔 찾아와 도박자금을 뜯어가는 양아치 형(차인표)뿐. 그런 그가 형의 도박 빚을 대신 갚아주려고 만난 대출상담원 일영(김희선)과 사랑에 빠진다. 알람도, 규칙적인 생활도 깨진다. 1600만 관객이 본 ‘극한직업’의 이병헌 감독이 각본을 쓴 영화 ‘달짝지근해: 7510’(감독 이한)은 유해진(53)이어서 설득력 있는 로맨틱 코미디다.

유해진이 등장하면 관객은 웃을 준비부터 한다. 27살에 영화 ‘블랙잭’(1997)의 트럭 운전사 단역으로 데뷔한 이래 25년간 61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베테랑’(2015)의 야비한 최상무, ‘공조’(2017)의 생계형 형사 강진태, ‘택시운전사’(2017)의 광주 택시기사 황태술, ‘1987’(2017)의 교도관 한병용, ‘말모이’(2019)에서 민족의식에 눈떠 가는 김판수, ‘봉오동 전투’(2019)의 독립군 황해철까지. 평범한 인물부터 때론 진중하고 때론 살벌한 역할까지 오갔지만, 그에게서 뗄 수 없는 건 웃음이다. 눈빛 하나로 바보부터 악당까지 변신할 수 있는 그는, 첫 단독 주연작 ‘럭키’(2016)에서는 목욕탕에서 미끄러져 기억을 잃은 킬러로 웃음폭탄을 던지며 697만 관객을 모았다.

‘순한 맛’ 로맨틱 코미디로 함께 호흡을 맞춘 배우 유해진(왼쪽)과 김희선. [뉴스1]

‘순한 맛’ 로맨틱 코미디로 함께 호흡을 맞춘 배우 유해진(왼쪽)과 김희선. [뉴스1]

‘사람’만 연기한 게 아니다. ‘전우치’(2009)에선 “나 초랭이, 더러운 인간으로 사느니 아름다운 개로 죽겠다”는 시원한 대사의 ‘개 인간’을 연기했다.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에 주인을 배신하지만 결국 사람보다 더 사람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SF영화 ‘승리호’(2020)에서는 작살잡이 로봇 업동이를 모션 캡처로 연기했다. 지난해에는 ‘올빼미’에서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무너지는 인조를 연기했다.

역사 속 인물부터 동물, 로봇까지 넘나든 그에게 로맨틱 코미디 주인공은 데뷔 후 처음이다. 뒤늦게 찾아온 첫사랑에 설레고 아파하는 치호를 연기했다. 아재 개그에 관심 있는 여자 앞에서 방귀를 뀌고는 “나쁜 생각을 내보내 준대요”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순박한 그의 사랑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9일 서울 종로의 카페에서 만난 유해진은 “잊고 있던 첫사랑의 설렘과 아픔을 되살리려 했다. 남녀 주인공이 함께 집밥을 먹던, 숟가락에 그려진 눈·코·입마저 마음을 슬프게 후벼 파는 게 있었다”고 돌아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로맨스를 연기하는 모습은 좀처럼 본 적 없는데.
“현실 감각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사랑을 느끼고, 두근거리고, 또 무너질 듯 아파하는 모습을 어떻게 그려낼지가 관건이었다. ‘어른들을 위한 소나기’랄까, 첫사랑의 무뎌진 기억을 떠올리려 했다.”
개·로봇보다 사랑 연기가 더 어렵던가.
“개나 로봇 연기는 잘 못 해도 이해해 주실 것도 같다. 특히 로봇 CG는 내가 (작업)하는 게 아니니까. (웃음) 그러나 이 영화를 본 관객이 ‘저 사랑은 잘 모르겠는데’ 하면 안 되지 않나. ‘저런 주인공을 왜 일영이 좋아하게 될까’라는 질문에 순수한 면모로 답하려 했다.”
장기인 코믹 연기의 비결이라면.
“작정하고 웃기려 하면 더 안 된다. 그저 코믹하게만 다가가면 가짜라고 느껴질 수 있으니, 코믹일수록 더 진실하게, 상황에 충실하게.”
욕심나는 역이 있다면.
“김희선씨와 로맨스도 해 보고, 심지어 지난해엔 왕도 해 봤다. 이번 영화를 본 윤제균 감독이 ‘많이 웃고 세 번 울었다. 정통 멜로도 해 보라’고 격려해줘 감사했다. 진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뒤에 오는 역할은 보너스와도 같다.”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나.
“그냥 배우면 된다. 다른 수식어 필요 없고, 배우 유해진.”

‘달짝지근해’는 15일 개봉한다. 배우 정우성의 감독 데뷔작 ‘보호자’,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대작 ‘오펜하이머’와 같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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