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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ㆍ로봇ㆍ임금도 해 봤지만 로맨스의 주인공은 데뷔 25년 만에 처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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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달짝지근해:7510' 속 유해진 [사진 마인드마크]

영화 '달짝지근해:7510' 속 유해진 [사진 마인드마크]

십여 개의 알람 시계로 하루를 시작한다.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솔로 닦고서야 옷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8시 정각. 녹색 프라이드 승용차 몰고 드라이브인 햄버거집 통과한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메뉴 주문하는 그에게 점원이 친근한 인사를 건네지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른다. 점심시간에도 개발할 과자 먹으며 혼자 일하다가 오후 6시 칼퇴근한다. 집-회사만 오가며 과자만 먹다가 영양실조에 걸린 제과회사 연구원 치호(유해진)다.
길 가다 시비가 붙어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째려봐도 하나도 안 무섭다. 가진 거라곤 가끔 찾아와 도박 자금 뜯어가는 양아치 형(차인표)뿐. 그런 그가 형의 도박 빚을 대신 갚아주려 만난 대출상담원 일영(김희선)과 사랑에 빠지면서 알람도, 규칙적 생활도 깨진다.
1600만 관객이 본 ‘극한직업’의 이병헌 감독 각본의 짠내 나는 로맨스 ‘달짝지근해: 7510’(감독 이한)은 유해진(53)이어서 설득력을 갖는 로맨틱 코미디다.


영화 데뷔 25년, 61개 작품 속 로맨스의 주인공은 처음

기억상실증에 걸린 킬러는 연기한 영화 '럭키' [사진 쇼박스]

기억상실증에 걸린 킬러는 연기한 영화 '럭키' [사진 쇼박스]

배우 유해진, 그가 등장하면 관객들은 웃을 준비부터 한다. 27살에 영화 ‘블랙잭’(1997) 속 단역 트럭 운전사로 스크린 데뷔 후 영화만 61편 출연했다.
‘베테랑’(2015)의 야비한 최상무, ‘공조’(2017) 속 생계형 형사 강진태, ‘택시운전사’(2017)의 광주 택시기사 황태술, ‘1987’(2017)의 교도관 한병용, ‘말모이’(2019)에서 한글 익히면서 민족의식에 눈떠 가는 김판수, ‘봉오동 전투’(2019)의 독립군 황해철까지. 우리 주변 평범한 사람부터 때론 진중하고 때론 살벌한 역할까지 오갔지만 그에게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건 웃음이었다.
눈빛 하나로 바보에서 악당으로 변신할 수 있는 그의 장기를 발휘한 첫 단독 주연작 ‘럭키’(2016)에서는 대중목욕탕에서 비누를 밟고 미끄러지는 바람에 기억을 잃은 전설의 킬러로 웃음폭탄을 던지며 697만 관객몰이를 했다.

'전우치'의 개 '초랭이'를 연기한 유해진 [사진 CJ ENM]

'전우치'의 개 '초랭이'를 연기한 유해진 [사진 CJ ENM]

‘사람’ 연기뿐만 아니다. "나 초랭이, 더러운 인간으로 사느니 아름다운 개로 죽겠다!"라는 '전우치'(2009) 속 시원한 대사로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렸다.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이 앞서 유혹에 빠져 주인을 배신하지만 결국 사람보다 더 사람다운 모습으로 남은 ‘개 인간’이었다. 발로 목을 긁거나 털을 터느라 온몸을 떠는 개 특유의 행동들이 눈길을 끌었는데, 당시 “출연을 결정한 뒤 길 가다가도 개들의 특징을 살피고 연구하다 보니 지나가는 개들이 남 같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SF '승리호' 속 로봇 업동이. [사진 넷플릭스]

SF '승리호' 속 로봇 업동이. [사진 넷플릭스]

SF영화 ‘승리호’(2020)에서는 작살잡이 로봇 업동이로 모션 캡처 연기를 했다. 재활용 센터에서 장선장(김태리)이 업어와서 이름도 업동이인 이 로봇은 인간이 아니어서 우주선의 궂은일을 도맡는다. 지난해에는 ‘올빼미’에서 소현세자의 죽음을 맞아 무너진 인조를 연기했다.

영화 '올빼미' 속 인조 역의 유해진 [사진 NEW]

영화 '올빼미' 속 인조 역의 유해진 [사진 NEW]

역사 인물부터 동물ㆍ로봇까지 넘나들었지만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은 데뷔 25년 만에 처음. 뒤늦게 찾아온 첫사랑에 설레고 아파 어쩔 줄 모르는 치호를 연기했다. 유머집에서 공부한 듯한 ‘아재 개그’는 물론 관심 있는 여자 앞에서 방귀 뀌며 “나쁜 생각을 내보내 준대요”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순박한 그의 사랑을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난 9일 서울 종로의 카페에서 만난 유해진은 “잊고 있던 첫사랑의 설렘과 아픔을 되살리려 했다. 남녀 주인공이 함께 집밥 먹던 숟가락에 그려진 눈ㆍ코ㆍ입마저 슬프게 마음을 후벼 파는 게 있었다”고 돌아봤다.

 영화 '달짝지근해:7510' 속 유해진 [사진 마인드마크]

영화 '달짝지근해:7510' 속 유해진 [사진 마인드마크]

영화 '달짝지근해' 주연 유해진 인터뷰

로맨스를 연기하는 모습은 좀처럼 본 적이 없는데.  

“현실 감각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사랑을 느끼고, 두근거리고, 또 무너질 듯 아파하는 모습을 어떻게 그려낼지가 관건이었다. ‘어른들을 위한 소나기’랄까, 첫사랑의 무뎌진 기억을 떠올리려 했다.”

영화 '달짝지근해' 주연 유해진 인터뷰

개ㆍ로봇도 해봤는데, 사랑 연기가 더 어렵던가.

“개나 로봇 연기는 잘 못 해도 ‘개이려고 했나 보다. 로봇이려고 했나 보다’ 이해해 주실 것도 같다. 특히 로봇 CG는 제가 하는 게 아니니까(웃음). 그러나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저 사랑은 잘 모르겠는데’ 하시면 안 되지 않나. ‘저런 주인공을 왜 일영이 좋아하게 되는 거야?’라는 질문에 순수한 면모로 답하려 했다.”

가장 장기인 코믹 연기의 비결이라면

“작정하고 웃기려 하면 더 안 된다. 그저 코믹하게만 다가가면 가짜라고 느껴질 수 있으니, 코믹일수록 더 진실하게, 상황에 충실하게.”

다양한 역할로 관객들과 만났는데, 욕심나는 역은?

“김희선 씨와 로맨스도 해 보고, 심지어 지난해엔 왕 역할까지 해 봤다. 이번 영화 본 윤제균 감독이 ‘많이 웃고 세 번 울었다’며 ‘정통 멜로도 해 보라’고 격려해 와 감사한 마음이었다. 그렇지만 뭘 해 본다기보다, 진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뒤에 오는 역할들은 보너스와도 같다.”

데뷔 25년, 61편의 영화 속 61개의 얼굴을 가진 그에게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다. “저는 그냥 배우면 돼요. 다른 수식어도 필요 없고, ‘배우 유해진.’”
‘달짝지근해’는 내일 개봉한다. 배우 정우성의 감독 데뷔작 ‘보호자’, 그리고 ‘원자폭탄의 아버지’를 그린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대작 ‘오펜하이머’와 같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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